회색 톤이 짙게 깔린 이성강의 애니메이션 비디오 작품은 기능주의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묵시록적인 종말, 궁극적으로 ‘인간’의 죽음을 떠올리며 개인의 센티멘털한 정서의 중요성을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스크린을 더듬는 듯한 느린 촉각적 화면, 조곡 같이 들리는 배경 음악, 계속되는 침묵은 우리를 판단의 진공 상태에서 그의 이야기 안으로 침몰하게 한다. 갑자기 UFO가 등장하여 벌어지는 의외의 사건 장면들은 이야기 전체에 균열을 만들어 준다. 우리 시대에 대한 악몽을 미리 꾼 것과도 같이 미래의 ‘어느 날 어느 상황’이라는 리얼한 느낌을 갖게 한다.
〈덤불속의 재〉, 1998. 16분. 작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