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공주

가톨릭관동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한국과 아시아의 민속과 굿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 황루시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무당굿놀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6년부터 국내 무속 현장 답사를 시작했고, 1988년부터 일본, 미얀마, 타이완, 베트남 굿에 대한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아시아 무속 문화의 비교 연구를 시도했다. 1988년부터 2016년까지 가톨릭관동대학교 미디어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2005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강릉단오제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신청서와 영상 원고를 집필했으며, 2007년 한국구비문학회 8대 회장 및 2011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인의 굿과 무당』 (문음사, 1992), 『우리 무당 이야기』 (풀빛, 2000), 『진도씻김굿(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화산문화, 2001), 『팔도 굿』(대원사, 2011), 『뒷전의 주인공』 (지식의 날개, 2021) 등이 있다. 최근에는 굿을 연극 형식으로 재구성하는데 관심을 가져 대표적인 무속신화 〈당금애기〉를 무대화하였고, 〈굿 위드 어스〉, 〈춤, 단오 그리고 신명〉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
것매 일곱고를 풀어 헷치시고
숨살이(숨살이꽃)는 숨에 넛코 뼈살이는 뼈에 넛코
살살이는 살에 넛코 일영쥬는 눈에 넛코
약려수(藥水)는 입에 흘녀 너흐시고
(대왕마마부부) 한날 한시에 회춘 하옵시니
잠도 깊히 들엇구나,
압바다 물구경 나왓든야
뒷동산 꼿구경 나왓든야
물구경도 안이옵고, 꼿구경도 안이옵고
한날 한시에 승하하서서, 인산거동(人山擧動) 낫나이다
칠공쥬(바리공주)가 약수 삼천리에 가서, 회춘약 구해다가
한날 한시에 회춘하야 게옵시나이다
우여! 슬푸다, 선후망(先後亡)의 아모 망재(亡者)
썩은귀 썩은입에 자세히 들엇다가 제보살님께 외오시면
발이공쥬(바리공주) 뒤를 딸어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가시는 날이로성이다1
서울지역 진오기굿2 속의 바리공주
저녁 어스름, 아침에 시작한 진오기굿이 막바지에 달해 마침내 망자가 가족들과 이별할 시간이 되었다. 굿당 앞마당에는 망자가 저승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할 열두 대문이 세워져 있다. 하루 종일 굿판에서 죽은 사람을 만나 울고 또 울었던 가족은 이제 지쳤는지 기운 없이 마루에 앉아있다. 그 가족들 앞에 화려한 복색의 무녀가 장고를 앞에 놓고 의자에 앉는다. 목이 휘청하게 무거운 큰 머리 얹고 칠보 장식한 은비녀에 찰랑이는 뒤꽂이로 온갖 호사를 한 무녀. 옷차림도 예사롭지 않다.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정사각형으로 만든 전통 페치코트 갈매막대기 위에 속치마만 열두 개를 껴입었다. 그 위에는 붉은색 비단치마를 떨쳐입고 당의를 걸쳤다. 옛날 공주 복색이다. 품위 있게 댕기를 늘어뜨리고 부채, 방울을 옆에 놓은 무녀가 굿을 시작한다. 가족들은 피곤한 몸을 추스르고 무당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귀 기울여 듣는다.
“나라로 나라로 공심은 절이옵고 남산은 본이로소이다.”3 이렇게 굿을 시작한 무녀는 장고를 세워 한 면만 당당당 치면서 바리공주의 내력담을 노래한다. 업비대왕은 내년에 결혼하면 아들 셋을 볼 것이요, 올해 결혼하면 딸 일곱을 낳을 것이란 점쟁이의 예언을 무시하고 결혼을 강행한다. 예언은 헛되지 않아 공주만 내리 여섯이 태어나자 실망을 거듭한 업비대왕. 결국 또다시 일곱 번째 딸이 태어나자 ‘버렸다 버리데기 바렸다 바리데기’ 바리공주라 이름 짓고 옥함에 넣어 멀리멀리 물에 띄워 버린다. 일국의 공주가 낳자마자 버려져 부모 얼굴도 모른 채 자라나는 기막힌 이야기, 그렇지만 하늘이 내린 자손을 버린 죄로 업비대왕은 죽을병에 걸린다. 다시 점을 치니 저승의 약물을 먹어야 낫는다면서 바리공주를 찾으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비로소 바리공주는 부모를 만난다. 부모 만난 기쁨도 잠시, 사정을 들은 바리공주는 “길러준 공은 없지만 낳아준 공이 있으니 소녀가 약수공양 가오리다” 목숨 걸고 저승길을 떠난다.
가녀린 처녀의 몸으로 어찌 저승길을 가랴. 남복(男服)하고 물어물어 온갖 고생을 다 한 끝에 저승에 다다르니 구척장신 무장승이 약물을 지키고 있다. 바리공주는 스스로 대국의 왕자라면서 부모 위해 약물을 길러 왔다고 한다. 무장승 하는 말씀, “참으로 이상하다. 그 나라에 공주아기씨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왕자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일세. 어찌 되었거나 물 삼 년 길어주고 나무 삼 년 해주고 불 삼 년 때주면 약물을 주리다.” 바리공주 하릴없이 물 삼 년, 나무 삼 년, 불 삼 년, 석삼년 아홉 해 일해주고 나니 마지막으로 함께 목욕을 하자고 한다. “당신은 저 위에서 하고 나는 아래서 목욕하면 되지 않겠소.” 응큼한 무장승은 몰래 바리공주의 옷을 감추고, 결국 여자임이 들통나자 이번에는 혼인하여 아들 일곱 낳아주면 약물을 주겠다고 한다. 도리없이 바리공주는 무장승과 결혼하여 아들 일곱을 낳는다. 어느 날 부모님 잡숫던 숟가락이 부러지는 꿈을 꾼 바리공주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짐작하고 무장승에게 약물과 생명꽃을 얻어 황황히 이승 땅으로 돌아온다. 아들 일곱, 남편과 함께 아버지를 살리려고 도착한 이승. 하지만 업비대왕은 이미 승하하여 상여가 나오고 있다. 상여를 멈춘 바리공주는 온몸을 생명꽃으로 어루만지고 입 안에 약물을 넣어 마침내 아버지를 살려낸다. 부모 살린 공덕으로 나라의 반을 주겠다고 하지만 바리공주는 이승의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고 저승의 신으로 좌정한다는 긴 이야기가 가족들의 간헐적인 흐느낌 사이를 넘나들면서 이어진다.
가끔 무녀는 노래를 멈춘다. 북을 당당 친 후에 “우여! 슬프도다 선후망의 아모 망제 오늘 바리공주 뒤를 따라 서방정토 극락세계 가는 길이오다.” 하면서 방울을 높이 흔든다. 가족은 망자가 방금 죽은 것 인양 ‘아이고 아이고’ 애달프게 곡을 한다. 그리하여 무녀의 부름을 들은 바리공주가 연민을 이기지 못하고 이 자리에 나타나 가여운 망자의 영혼을 구원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가족들은 쉰 목을 짜내어 곡을 하는 것이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
아마도 등 뒤에는 아까부터 망자를 저승으로 데려갈 사자가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저승사자에게 죄인처럼 질질 끌려가게 할 것이냐, 아니면 바리공주의 따뜻한 인도를 받으면서 저승에 곱게 모셔질 것인가, 그것이 판가름 나는 중차대한 시간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낯설고 두려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갈 바를 모른 채 막막한 영혼들. 바리공주는 삶이 끝나는 그 자리에 서서 길 잃은 영혼을 구원해주는 모성의 신이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린 그 효심으로, 저승 가는 길에 온갖 병든 영혼을 달랬던 그 따뜻한 인정으로, 미지의 세상을 개척하고 돌아온 경험자의 여유를 가지고 오늘 한 많은 망인의 몸을 받아 사뿐히 저승으로 옮겨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바리공주, 오늘 그녀는 굿을 받는 망자와 망자를 사랑하는 가족에게 유일한 구원이요 희망이다.
바리공주의 다양한 얼굴
바리공주는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이 가능한 매력 있는 인물이다. 첫째 효녀로서의 바리공주가 있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위해 목숨 걸고 저승에 갔고 거기서 약물을 구해 와 결국 살려냈다는 점에서 바리공주는 희생적 효녀의 일인자이다. 견줄만한 인물로 심청이가 있지만 심봉사는 딸을 버린 적이 없기에 단연 바리공주가 우위를 점한다.
두 번째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진정한 여성의 힘을 보여준 인물이라는 점이다. 바리공주는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려진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를 살려냄으로써 남녀차별 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극복해 낸 존재가 되었다. 〈방귀 잘 뀌는 며느리 이야기〉는 이와 유사한 주제를 가벼운 웃음으로 푼 민담이다. 며느리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시아버지의 말을 믿고 참았던 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막상 현장을 본 시아버지는 돌변하여 며느리를 쫓아낸다. 친정으로 가는 길에 며느리가 필살 방귀 한방으로 높은 나무에 매달린 배를 따서 비단과 유기를 얻게 되자 ‘네 방귀가 복방귀다!’ 라면서 다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 한쪽은 비장하고 또 한쪽은 웃음으로 풀었다는 차이가 있으나 주제는 사실상 유사하다고 하겠다.
세 번째는 무당의 조상신, 또는 저승의 오구신으로서의 바리공주이다. 이 둘은 무당의 기능과 연결되는 존재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무당의 기능 중의 하나가 병을 고치는 것이다. 조선조 국가의료기관인 활인서에도 무당이 배치되어 있었다. 죽은 사람을 살려냈으니 바리공주는 마땅히 최고의 의무(醫巫)가 될법하다. 그래서 서울 지역의 무녀들은 바리공주를 무조신(巫祖神)으로 모신다. 그 외 지역에서는 오구신으로 신앙하고 있는데 굿에 등장하는 바리공주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처럼 넋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의 문턱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는 존재이다. 망자가 모든 죄를 깨끗이 씻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 저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신이 바리공주이다. 무당은 병든 인간의 몸과 마음을 동시에 치유한다. 몸과 마음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리공주가 그랬듯이 무당은 인간의 병을 치유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리데기에서 만인간의 공주로 다시 태어나다
이 작품에 대한 논의는 이름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바리공주는 바리데기라고 부른다. 같은 인물을 지칭하는 이름이지만 의미는 상반된다. 공주는 모든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바리데기는 부엌데기, 구박데기처럼 천한 존재이다. 바리공주가 천한 바리데기가 된 것은 부모에게서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버렸다 버리데기, 바렸다 바리데기’ 부모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바리공주를 버렸다. 그런 점에서 바리데기는 남성 위주 봉건사회의 모순이 만들어 낸 인물이다. 하지만 이 신화의 핵심은 불평등한 사회의 문제점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오히려 버려진 바리데기야말로 진짜 공주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
신화는 바리공주의 신분이 바리데기로 하락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결국 바리데기가 진정한 공주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부조리한 제도와 인간사회의 갈등을 뛰어넘어 만인간의 공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바로 이 신화의 중심 내용이다.
바리공주가 태어난 가정은 남성중심의 가부장 제도를 고집하는 아버지와 그에 기생하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버지는 가족을 대표하는 중심인물이지만 동시에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예언을 무시하고 혼인하여 딸 일곱을 낳았고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바리공주를 버렸으며 결국 그 죄로 병들어 바리공주가 목숨 걸고 저승으로 가는 원인을 제공한다. 어머니는 수동적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는 인물이다. 남편의 부당한 처사를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한 채 순종하였고 그 결과 제 손으로 딸을 버리는 책임감 없는 모정을 보여준다.
바리공주의 언니들 역시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들이다.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고 성장하였지만 독립적인 인간도, 효심 있는 딸도 되지 못하였다. 아버지를 위해 약물 길러 가겠냐는 말을 듣자 언니들은 “후원에서도 길을 잃는데 어찌 서천서역국을 갈 수가 있나” 하면서 거절하거나 “살아 계실 적에 옥쇄는 누구에게 물려줄 것이며 어느 사위를 부마 삼을지” 물으며 자신의 살길만을 도모하는 영악한 인물로 등장한다. 아무도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가정의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는 조정도 마찬가지여서 왕을 위해 저승에 가겠다는 신하는 한 사람도 없다. 이들은 단순히 상하관계, 명령과 복종의 관계였던 것이다. 명령은 권력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힘에 의지한 관계는 힘을 잃어버리자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권위적인 가부장 제도, 나아가 봉건사회의 한계인 것이다.
그러나 바리데기는 여기에 속한 인물이 아니다. 바리데기는 떠돌아다니는 거지 부부에게서 양육 받거나 산속에서 홀로 자란다. 남성 중심의 권위적인 사회제도 때문에 버려졌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인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부모를 만난 뒤 저승길을 결심한 것은 오직 자식으로서의 도리 때문이다. “국가에 은혜와 신세는 안젓지만은 어마마마 배 안에 열달 들어잇든 공으로 소녀 가오리다.” 이처럼 바리데기의 행위는 무조건적인 효성에서 비롯된다. 가난 속에서 돌봐주는 사람 없이 자랐지만 오히려 인간의 도리를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바리데기의 인격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떠난 저승길에서 완성된다. 바리데기는 저승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마침내 자신의 가정을 이루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막상 효심 하나로 길을 떠났지만 바리데기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도움 없이 저승에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셈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신뢰를 갖고 있는 바리데기는 물어물어 저승길을 찾아간다. 그런데 바리데기가 길을 묻는 대상은 하나같이 일하는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소로 밭을 갈고 있거나 방아를 찧거나 추운 겨울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랬다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공짜는 없다. 그래서 바리데기도 반드시 일을 거들어 준 뒤 그 대가로 길을 묻는다. 소 한 마리로 힘들여 넓고 넓은 밭을 갈기도 하고 방아 찧는 농부를 거들어 준다. 한겨울에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는데 방망이 들고서 여기를 뚜드려서 얼음장을 떠가지고 뚝 떼 깨쳐놓고” 빨래도 한다.
그런가 하면 깨끗한 물이 나올 때까지 숯 씻기, 무쇠다리 아흔아홉 간 놔주기, 탑 쌓기, 머리에 이가 끓어 가려워하는 노인을 무릎에 눕혀놓고 이 잡아주기 등의 일을 통해 자신을 수련하면서 공덕을 쌓는다. 이처럼 바리데기는 일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로 튼튼한 일꾼이 되고 불특정 다수를 위해 헌신하는 마음을 배우면서 저승으로 간다.

마침내 저승에 도착하자 약물지기는 원하는 약물을 얻으려면 일을 하라고 시킨다. 바리데기는 나무하기 삼 년, 불때기 삼 년, 물긷기 삼 년, 석삼년 아홉 해 동안 묵묵히 일한다. 일상적인 노동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장 힘들고 고단한 일이다. 물을 잘 긷는다고 자랑할 것도 아니요 나무를 잘한다고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며 불을 잘 땐다고 칭송받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살기 위해서 하루하루 해야 할 노동일 뿐이다. 후에 바리데기가 여자인 것을 안 약물지기는 아들 일곱을 낳아주어야 약물을 주겠다고 한다. 바리데기는 약물지기와 혼인하고 아들 일곱을 낳는다. 일상적으로 노동하고 줄줄이 아기 낳아 키우는 보통 아낙네의 삶을 온전히 살아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바리데기는 노동으로 단련된 일꾼이 되고 모성을 지닌 여인이 되어 비로소 민중의 대표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비록 약물지기의 뜻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혼인이었지만 바리데기는 가정의 중심인물이 된다. 마침내 바리데기가 약물을 얻어 아버지를 구하려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아들 일곱만이 아니라 남편도 아내를 따라오기 때문이다. 영동지역 본에서는 남편인 동수자가 혼자 하늘로 올라가버리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는다. 바리데기는 책임감 있는 어머니로서 일곱 아들을 등에 업고 가슴에 안고 한편 걸리면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다시 먼 길을 떠난다. 서울본에는 무장신선이 바리데기를 따라 이승으로 온다. 그동안 바리데기는 남편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남편은 아내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여 가정의 실질적인 중심이었음을 인정한 뒤 바리데기를 따라오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가정을 이룬 뒤 돌아와 부모를 살린 바리데기는 저승을 관장하는 신으로 좌정한다. 바리데기뿐 아니라 남편과 일곱 아들도 각자 일을 맡게 된다. 하지만 바리데기가 중심이 되는 세상은 남성 위주의 편견이 지배하는 가부장제도의 사회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 힘겹게 노동하면서 일하는 사람과 연대하고 책임 있는 어머니, 남편의 존중을 받은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가족 모두 직분을 갖고 일하는 세상을 만든다. 새로운 여성상을 성취한 바리데기는 민중의 희망이 되고 비로소 진정한 만인간의 공주가 된 것이다.
힘없는 존재의 힘
바리공주는 아버지를 살렸지만 세상의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았다. 나라를 받는 대신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한 무당의 조상신, 저승의 신이 되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바리공주가 아버지를 살리고도 현실에서는 아무 공을 얻지 못한 채 실패한 뒷담화일 수도 있다. 고지식한 바리공주가 아니라 처음부터 속셈이 달랐던 언니의 남편이 왕이 되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중은 그런 바리공주를 자신들의 진정한 공주로 세웠다. 그렇다면 바리공주는 실패한 사람의 편에서 말하는 또 하나의 역사이다. 실제 삶에서는 졌지만,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이 된 인물의 이야기인 것이다.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힘이다. 지구의 경찰을 자임하면서 전쟁을 도발하는 미국중심의 국제사회나 권력형 비리가 끊이지 않는 우리 사회 모두 힘을 중시하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 겉으로는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현실 세계는 힘 있는 몇몇 사람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 가운데서 현대인들은 심각한 소외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념적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가장 왜소한 시대가 바로 현대이다.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는 현대 지구 사회의 이념 갈등, 인종 갈등을 포함하여 온갖 아픔을 체험한 여인을 주인공 바리로 내세웠다. 전쟁과 살육이 난무하는 이 세상을 무엇으로 치유할지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고통과 아픔을 경험한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고, 적을 이웃으로 끌어안아 평화를 전해줄 수 있다는 소박한 진실이 담겨 있다.
허수경이 노래했듯이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오늘 바리공주는 소외된 현대인의 희망이다. 자신을 버린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여 죽음의 길을 다녀왔지만, 또다시 버림받은 바리공주. 가장 처절하게 소외된 그녀의 삶은 가장 많은 사람들을 위로한다. 그 스스로 아무 힘없는 존재이기에 오히려 의지가 된다. 바리공주 무가를 ‘말미’라고 부른다. ‘말미’는 말미암다, 모든 일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다. 죽음은 삶의 근원이고 삶은 죽음의 근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바리공주는 죽음을 끌어안아 삶을 완성했다.
권력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지만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종교와 예술은 영역을 공유한다. 무당과 예술가, 모두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 그 영혼을 움직이려는 사람들이다. 최근 많은 예술가들이 바리공주와 연대하여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바리공주의 능력은 주술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외된 민중의 희망, 그것을 끌어안았을 때 힘없는 존재의 힘이 발휘된 것이다.
본 저작물은 2025년 10월 발간 예정인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5)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본 저작물은 저자의 동의 하에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웹사이트와 e-flux 저널에 선공개됩니다. 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와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2025 필자, 저작권자,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