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평양〉은 안데스 산맥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해 칠레가 남미 대륙에서 분리되어 섬이 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볼리비아에 방문했다가, 1879년 칠레와 볼리비아-페루 연합군 간에 벌어졌던 남미 태평양 전쟁에 대한 볼리비아 국민들의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는 미묘한 감정을 직접 목격하고, 이 작품을 제작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해 칠레에 해안 연안의 영토를 빼앗긴 볼리비아에서는 당시 전쟁의 불의를 기록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을 만큼 여전히 민감한 주제인 반면, 칠레에서는 전쟁의 발발에 대한 얘기보다는 칠레가 가장 긴 해안선을 가진 나라라는 점만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애니메이션은 종이와 스티로폼(실제 이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는 교육 자료)으로 만들어진 모형 산과 바다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땅이 갈라지는 장면으로 연출되었다. 이는 진실의 개념, 상대적 신뢰도, 역사적· 사회적 감정, 정치적 조작 등에 대한 문제들을 건드린다. 애니메이션에 이어 흑백 보도 사진들이 한 장, 한 장 지나가면서 칠레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내레이션이 단호한 어조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어제, 무질서, 폭력, 불안”, “오늘, 질서, 평화” 등의 단어가 차례로 언급되는 식이다. 영상은 태평양과 칠레 연안 지도 이미지를 배경으로 실제 지진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 깔리다가 노래와 함께 끝을 맺는다. 완전히 상반된 톤의 이 내레이션들은 과연 진실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