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십진법에 따른 연애편지〉, 〈작고 따듯한 죽음〉, 〈계시의 나날과 자매〉로 이루어진 김실비의 영상 설치작은 종교의 탈을 쓴 자본주의적 패권에 대한 가짜 예찬이다. 이는 갈수록 낯설게 가속되는 정치·경제·기술적 생존의 조건을 견디기 위해 시도하는 방책이다. 죽음, 끝, 소멸을 은폐하기보다는 직시했을 때, 인간을 맹신과 파괴로 내모는 일련의 현상들을 달리 바라보고 생명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를 탐구한다. 모든 표면에 걸쳐, 과거에서 웹상으로 회귀했거나 저작권이 만료된 영상 자료, 무료 제공 출처의 동영상과 도판 등이 대폭 사용되었다.
〈육십진법에 따른 연애편지〉는 공공 공간의 광고나 인터넷 짤방(meme) 등의 형식을 연상시키는 일종의 디지털 필사본이다. 설치에서 양식화된 글, 경전 또는 연애편지의 역할을 담당한다. 일련 번호로 정리된 59개의 조항은 변형된 음계의 전자 알림이 울릴 때마다 하나씩 다음으로 전환된다. 우주와 시간의 생성 원리, 동시대 관습법과 몸을 둘러싼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문구와 다양한 이미지가 연쇄적으로 등장한다. 〈작고 따뜻한 죽음〉은 ‘경전’에서 파생된 미술사적 혹은 종교적 도상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이미지이다. 불교의 만다라 구성을 취했으나 일그러진 채 벽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해골이 아니라 신체 기관의 해부 도식 및 동물의 살 도판 등으로 짜깁기된 메멘토 모리이다. 〈연애편지〉와 〈계시의 나날과 자매〉 사이에 위치하여, 〈계시의 나날과 자매〉의 현실세계가 등장하는 영사면 일부를 잠식한다. 한편 〈계시의 나날과 자매〉의 두 인물은 도시 공간 안, 탄생과 사멸을 둘러싼 제례에 몰두하며 신비로운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들의 몸은 일종의 음화(陰畵)가 되어 역사와 미래 사이, 스러질 듯 스러지지 않고 살아가는 개별적 존재들을 대변한다. 한편 출연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연출되지 않은 순간이 삽입되어 작업의 이면, 실제 현실의 단면을 노출시키고 전체 구조를 교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