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르세데스 아스필리쿠에타는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혀진 인물의 이야기를 조사하여 고착된 역사적 서사와 집단적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작가이다. 작가는 사변적인 연상과 허구를 통해 가부장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역사 서술에 도전하는 일종의 반박 서사를 구축하여, 반체제적인 목소리, 언어, 실천들이 역사에 반영되는 것에 신경쓴다. 부드러운 조각, 직물, 설치나 퍼포먼스로 이루어진 작품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결합하고, 수공예와 산업적 제작 기법을 혼용하며, 느슨하게 뒤엉키는 감성을 통해 확장 가능하고 다원적인 서사를 수용한다. 〈중위수녀가 지나가네:카탈리나,안토니오,알론소 외 여러 명의 자서전〉은 ‘중위 수녀’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카탈리나 데 에우라소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카탈리나 데 에우라소는 1600년대초 바스크 지방의 수녀원에서 생활하던 중, 그곳의 가부장적인 문화를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여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 여러 신원의 남자 행세를 하며 살던 그녀는 종국에 스페인 제국에 충성하는 잔혹한 정복자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여성인 성정체성을 밝혔지만, 교황으로부터 남성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허락 받게 된다. 4미터 길이의 자카드 원단 직물로 이루어진 작품은 데 에우라소의 성정체성으로부터 비롯된 초현실적인 긴장과 모순을 식민지 정복사의 사색적이고 지리적인 맥락과 함께 엮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