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의 존재자를 소환하기

김남시
마야 데렌, 〈마녀의 요람〉, 1944. 16mm 필름을 변환한 디지털 영상. 13분. 르부아 파리 및 마야 데렌을 대신하여 타비아 이토 제공.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 서울시립미술관, 2025. 사진: 홍철기

김남시는 서울에서 미학, 베를린에서 문화학을 전공하고 2015년부터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예술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예술, 광기, 글쓰기』, 『본다는 것』 등의 저서와 다니엘 파울 슈레버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보리스 그로이스의 『새로움에 대하여』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동시대 사상과 예술이론을 추적, 연구하며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쓴다.



연구명 변신의 존재자를 소환하기

분류 에세이

에디션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저자 김남시



“당신이 일단 ‘이분화’에서 벗어나고 나면, 어떤 것도 당신이 사실상 상호작용을 하기를 멈춘 적이 없던 존재자들과 다시 연결되는 것을 막지 않을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1


근대주의는 근대성 밖의 인식론과 우주론들이 원시적일 뿐만 아니라 실재가 아니라고 일축하며 전개되었다. 라투르에 따르면, “마법을 믿고 물신이나 부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주술사를 부르러 보내고 무당에게 꿈을 풀이해 달라고 해야 하는 ‘다른 부족’이나 ‘시골뜨기’들을 거들먹거리며 조롱”해 온 근대주의자들은 전통적 집합체들이 “이 ‘비가시적 존재자들’을 포착하고 위치시키고 제도화하고 의례화하기 위해 해왔던 엄청난 작업”을 미신으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동시에 “이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세계에 투영된 내적인 표상일 뿐”이라며 이들로부터 “모든 외부적 존재를 박탈”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여기에 맞서 라투르는 이 존재자들에게 그 “외부성, 그들 자신의 진리를 주려고” 한다. 그런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존재자들이 내부에서 외부로 투사된 표상이나 상상, 환영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들에게 테이블이나 의자와 같은 존재의 연속성, 동위태를 요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2­

이 곤란함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은 우리와 연결된 이 존재자들이 어떤 일을 해왔는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들이 마주하는 다른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운과 고통, 그리고 다양한 상황과 조건들에서 생겨나는 인간의 욕망과 좌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인간을 넘어서는 우주적 질서가 존재하며,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질서와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믿게 했다.3­ 이들은 또한 불행으로 약해진 인간을 위로하고, 현재 자신의 불행이 어떤 과거사와 연관되어 있는지 생각하게 하고, 죽은 이들과의 관계를 상기시키며, 한 개인이 죽었다고 해서 모든 게 다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한다.

이 까다로운 존재자들은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질투하고, 충분히 대접받지 못했다고 여기면 모욕을 느껴 살아있는 사람들을 괴롭히지만,4­ 잔치를 대접받고 듣기 좋은 말을 들으면 회유되어 인간을 돌보아 주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여성들이 “남성을 중심으로 정의된 친족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면서 중요한 역할을 맡도록 하였고, “결혼을 통해 그 집으로 들어와 잠재적인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협력”하게 만들었다.5­ 라투르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와 상호작용을 하며 우리를 변형시키고, 그 자신도 다른 어떤 것으로 변형하는 이들을 “변신의 존재자”라 부른다.6­

변신의 존재자와 우리의 관계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우리가 “그 존재자들과 친숙해지려면 인공적 장치, 즉 의례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7­ 이들은 의례와 관련된 사물 사이에 나타나며 그를 통해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무당이 흔드는 방울과 노래로 호출되고, 위패나 망자의 옷, 대들보에 매달아 놓은 솔잎 뭉치에 머물며, 성주받이를 할 때 내림 받는 자가 손에 든 소나무 가지나 오방 신장기의 흔들림으로, 강령술 참여자들이 손을 올려놓은 플랜챗의 미끄러짐으로 자신들의 도래를 알린다.

인류학자 로렐 켄달은 한국 무속에서 성주신을 모시려고 벽에 붙이는 그림이나 지화, 조상이나 망자의 혼이 머무는 옹기, 항아리, 조리, 만신이 사용하는 촛대, 향로, 부채, 거울, 칼 등을 그 자체로 ‘살아있는’ 페티시로 보는 견해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이는 무력한 물질에 영을 부여하는 애니미즘적 세계관이 아니다. 영의 모빌리티가 인간 행위자를 움직여, 살아있지 않은 사물들과 무당의 몸에 영을 초대해 거기 현존하게 하는 것이다. 영의 의도와 결합한 인간 행위성이 항아리나 바구니, 그림에 신들이 거하거나 떠나게 하는 원인이다.8­

그렇기에 라투르와 더불어 우리는, 손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혼자 말하고 있는 사람을 이상하고 비정상이라 판단하기 전에, 그가 무엇을 통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장치가 그들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는지”9를 함께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법의 산

토마스 만의 『마법의 산』(1924)은 젊은 엔지니어 한스 카스토르프가 결핵으로 입원 중인 사촌 요아힘을 문병하러 알프스의 요양원을 방문하며 시작한다. 그 자신도 결핵 의심 판정을 받고 7년간이나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주인공이 겪은 ‘가장 의심쩍은 일’10­은 강령술과의 만남이었다. 19세 덴마크 소녀 엘렌 브란트는 숨긴 물건을 찾거나 사람들이 정한 과제를 알아맞히는 사교 놀이에서 이례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알고 보니 오래전부터 홀거라는 이름의 영이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요양원 사람들은 그녀를 영매 삼아 영성주의적 사교 놀이를 벌이고 카스토르프도 여기 참석한다. 그 방엔 강령술을 위한 도구와 장치들이 이렇게 세팅되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중간 크기 정도의 식탁보를 덮지 않은 탁자가 놓이고, 그 위에 와인잔이 받침을 위로하고 거꾸로 놓였다. 탁자 가장자리를 따라 같은 간격으로 평상시에는 카드놀이에 사용되는 작은 말들이 놓였는데, 거기에 스물다섯 개의 알파벳 철자가 새겨져 있었다. … 차로 몸을 따뜻하게 한 후 모두들 조그만 탁자 주위에 둘러앉았다. 주인인 클레펠트는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천장의 불을 끄고 덮개로 가린 나이트 테이블의 전기스탠드만 켜 놓아 방이 은은하게 장밋빛으로 빛났다. 모두 오른쪽 손가락 하나를 유리잔 받침에 살짝 대었다. 이것이 와인잔 움직이기 놀이 방식이었다. 모두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유리잔이 움직이게 될 순간을 학수고대했다.11

보스턴 플랜챗. 1860년 경. 『American Broadsides and Ephemera』 시리즈 1호

여기서 와인잔은 강령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플랜챗의 대용품이다. 보통 플랜챗은 그 위에 손이나 손가락을 올려놓을 수 있을 크기의 나무로 제작되었는데 여기서는 뒤집어 놓은 와인잔이 그를 대체했다. 탁자 주변에는 알파벳 문자가 새겨진 말들이 배치되어 있다. 엔지니어 카스토르프는 강령술의 신빙성을 의심했다. 매끈한 탁자 위에 놓인 와인잔은 조금만 힘을 가해도 움직일 수 있는 데다, 그 위에 올린 사람들의 손가락 힘들도 균등하지 않을 것이기에 언제든 한쪽으로 밀려 특정 문자와 부딪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식으로 부딪힌 문자들의 조합이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면 사람들은 ‘유리잔을 통해 죽은 자의 영혼이 말한다’라고 여길 것이다. 이건 사람들이 ‘마술적’이라 부르는 이 ‘가상 사물 또는 유사 사물’에 걸고 있던 기대에 형식을 부여해 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는 결국 “각자의 의식적이고 반의식적이며 무의식적 요소들이 뒤섞인 산물”로 “내적으로 거의 불순하다고 할 복잡한 현상”에 다름없지 않을까?12­

그런데 놀랍게도 잠시 후 탁자와 유리잔, 그 위에 자기 손가락을 올린 사람들 사이에 소환된 영은 자신의 이름과 생전의 직업(시인)을 알려주고는 바다와 시간에 대한 그럴듯한 시를 짓기도 했다. 홀거의 영이 와인잔을 움직여 “문자들을 가리키면”(buchstabiert) “둘러앉은 사람들이 감탄하며 그를 함께 소리 내는” 방식으로 “꿈꾸듯이 과감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문장과 시가 “꿈꾸듯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이 “마법적 사물성”의 행위자는 누구였을까?13­ 영매인 엘렌 브란트? 그녀의 수호령 홀거? 뒤집어 놓은 와인잔을 따라 손과 몸을 움직인 참가자들? 아니면 탁자와 와인잔, 스물다섯 개의 알파벳 문자, 그 사이에 현존하게 된 영으로 이루어진, 인간-비인간 존재자들의 연결망?

이 사건 이후 카스토르프를 지배하던 근대적 이분화가 흔들리고, 확고하게 믿었던 물질과 비물질, 실재와 꿈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강령술은 속임수에 불과하고 영매인 엘렌 브란트는 상종 못 할 사기꾼이라는 합리주의자 세템브리니의 일갈에 그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현실이란 것이 명확하게, 의심의 여지 없이 규정된 것 같지 않으니, 사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마찬가지로 분명하지 않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 경계는 흐릿할지 모른다. 어쩌면 둘 사이에는 이어짐이, 말과 가치 판단 없는 자연에는 실재의 연속적 등급들이 존재할지 모른다. 이건 [한쪽으로의] 결정을 거부하는데, 그 결정에는, 그가 보기엔, 뭔가 강하게 도덕적인 것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세템브리니 씨는 ‘눈속임’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할까, 꿈과 현실의 요소가 섞여 있는 이 개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어쩌면 이 혼합은 우리의 거친 일상의 생각보다 더 자연에 친숙할지도 모른다. 생의 비밀에는 말 그대로 바닥이 없는데 거기서 종종 눈속임들이 떠오르는 게 무슨 놀랄 일이겠는가.14­­

카스토르프가 말하는 “생의 비밀”이라는 단어는 유기체 진화의 추동력으로 ‘생의 약동’을 이야기한 앙리 베르그송의 생기론과 맞닿아있다. 1912년의 논문 「영혼과 신체」에서 베르그송은 정신/영혼이 신체와 독립적임을 강조한다. 우리의 지각과 기억이 시공간적으로 묶여있는 신체를 초과하듯 정신의 삶은 신체의 효과가 아니다. 오히려 신체가 정신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체의 죽음 이후에도 정신의 삶이 존속한다는 게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일 것이다. “죽음 이후에 의식의 소멸을 믿는 유일한 근거는 신체의 조직 파괴가 관찰된다는 것이고, 만일 의식 전체가 대부분 신체의 측면에서 독립적이라는 것 역시 확인되는 사실이라면 이 근거는 더 이상 가치가 없을 것”이다.15 1913년 정신연구학회 회장 취임 기념 강연에서 베르그송은 한발 더 나아간다. “우리는 영혼이 신체 없이도 존속한다는 것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 [연구된 사실들이] 정신적 삶을 뇌의 삶보다 훨씬 더 광대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면, [정신의] 존속은 아주 개연적인 것이 되어 증명의 책임은 그것을 긍정하는 사람에게보다는 부인하는 사람에게 부과될 것이다.”16­

『마법의 산』에 등장하는 의사 크로코프스키는 오컬티즘과 깊이 결합해 있던 20세기 초 정신의학의 모습을 대변한다. 피에르 자넷과 테오도르 플루노이 같은 당대 정신의학자들처럼 그 역시 과학적 방법과 장치를 통해 영매와의 실험에 착수한다.17­ 그는 영매와의 ‘훈련’ 과정에 생겨난 현상들—휴지통이 떠오르고, 벽시계 추가 멈추었다 다시 움직이고, 탁상용 종이 울리는—을 “물질을 끌어당겨 실재에 스스로를 일시적으로 각인할 수 있는 생각의 능력”에 기반하며, “잠재의식적 복합체가 물체에 생물심리적으로 투사”된 결과라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죽은 자를 심령적으로 불러내는” 강령술을 위해 그가 준비한 실험실의 어두운 조명이, 결코 “분위기를 만들거나 신비화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그의 실험은 꽤 성공적이어서, 밀가루를 발라놓은 접시에 젊은 남자의 손자국이 찍히거나, 참가자들이 “초월적 저세상으로부터 세게 뺨을 얻어맞거나”, “영의 손을 만지는” 일도 생겨났다.18­ 하지만 가장 극적인 사건은 카스토르프의 죽은 사촌 요아힘 침센의 영혼을 불러낸 것이다.


환상적인 것

카스토르프의 눈앞에 나타난 군복 입은 요아힘의 영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건 어두운 조명과 사람들의 격해진 감정이 만들어 낸 집단 환각이거나 누군가의 속임수였을까? 만일 그런 것이었다면 소설 『마법의 산』은 츠베탕 토도로프가 정의하는 기이함, 즉 ‘언캐니’ 장르로 분류될 것이다.

『환상문학 서설』(2013)에서 현대 문학 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는 ‘환상적인 것’을 ‘기이한 것’과 ‘경이로운 것’ 사이의 긴장감으로 정의한다. 이는 작품에 등장하는 초자연적 현상, 현실의 법칙을 넘어서는 현상들을 내러티브가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구별된다. 처음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불가사의하며 초자연적으로 보였던 사건이 주인공의 꿈 또는 환각이었거나 [탐정 소설에서처럼] 지능적인 범인의 트릭이었음이 밝혀진다면 그건 ‘기이 장르’가 된다. 여기서 독자는 “현실의 법칙에 타격을 입히지 않고도 묘사된 현상을 그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이와는 달리, 예를 들어 하늘을 나는 양탄자, 인간과 싸우는 드래곤이 등장해 “독자가 그 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자연법칙을 가정해야 한다고 판단”하면 그 작품은 ‘경이 장르’로 들어간다.19­

‘환상적인 것’은 그 경계에 있다. 환상적인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야기된 사건들에 대하여 자연적인 해석과 초자연적인 해석 사이에서 망설이도록 강요한다.”20­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 현실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자연법칙을 가정해야 하는 것인지 결정할 수 없을 때, 그에 대한 전적인 불신도, 절대적 믿음도 불가능할 때 생겨나는 망설임이 ‘환상적인’ 것의 조건이다.

강령술 참여자들 앞에 나타난 요아힘의 영혼을 부인하지도, 해명하지도 않으면서 『마법의 산』은 독자에게 환상적인 것의 영역을 연다. 여기서 무엇인가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데 우리는 “실제로 바깥에 아무것도 없는데 불안해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누군가가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압박하는 무언가가 정말 있기 때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21­를 결정하지 못한다. 이 망설임과 더불어 우리는 ‘환상적인 것’의 영역에 들어서는데, 거기에 변신의 존재자, 이 특이한 외부자들이 나타난다. “우리가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무섭게도 거기 있었어’ 또는 ‘무언가 있는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외부자들”이.22­


초현실주의

토마스 만은 이 특이한 외부자들을 저자와 그의 독자들이 살고 있는 현실 공간과는 지리적, 환경적으로 떨어져 있는 알프스의 요양원에 등장시키는 데 그쳤다. 이와는 달리 초현실주의는 이들을 지금 이곳, 우리와 가까운 현실, 나아가 우리 자신 안에서 찾으려던 예술적 실천이다.

1922년 9월 25일 밤, 앙드레 브르통과 그의 부인 시몬 칸은 젊은 시인 르네 크레벨, 막스 모리스, 로베르 데스노스와 함께 강령술 모임을 가졌다. 이들의 강령술은 죽은 이의 영혼이 아니라 정신 안의 타자를 소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서로 손을 잡고 탁자에 둘러앉은 지 얼마 후 멤버들이 하나둘 트랜스 상태에서 단어나 문장을 발화하기 시작했다. ‘수면 세션’의 출발이었다. 1923년 봄까지 이어진 수면 세션에는 폴 엘뤼아르, 벤자민 페레, 막스 에른스트, 루이 아라공, 만 레이, 조르조 데 키리코가 가세했다. 크레벨, 데스노스, 페레는 반복적으로 트랜스 상태에 빠져 말하고 질문에 답하고, 종이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이 상태에 빠진 데스노스를 깨우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함께한 멤버 일부가 스스로 목을 매려는 사태가 일어나자, 브르통은 이 세션을 중단했다.23­

도취 상태에서 발화된 단어와 문장들은 그들을 놀랍게 했다. 그 문장들은 시적으로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힘까지 가지고 있었다.24­ 1928년 『나자』에서 브르통은 이를 ‘신탁’에 비교한다.

지금 나는 우리가 가끔 ‘수면 시대’라고 불렀던 시기의 로베르 데스노스를 떠올리고 있다. 그는 ‘자면서’ 글을 쓰고, 말을 했다. … 데스노스는 나는 보지 못하는 것, 그가 내게 보여주려고 해야만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계속 보고 있다. … 전혀 망설임 없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아주 놀라운 시적 방정식들을 종이 위에 옮겨놓는 데스노스의 필치를 보지 못한 사람이거나 나처럼 그 시구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리 그 시적 기법의 완벽성을 인정하며 놀라울 정도로 경쾌한 날갯짓의 형태를 평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 담겨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 시구가 갖는 신탁의 절대적인 가치에 대해서 어떤 인식도 갖기 어렵다.25­­

흥미롭게도 “자면서 글을 쓰고 말하는” 이 인위적 몽유 상태는 죽은 이의 영혼을 불러내기 위해 강령술 참가자들이 갖추어야 할 마음 상태와 다르지 않았다. 의사 크로코브스키는 손을 맞잡고 테이블에 앉은 참여자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방문자를 강박적으로 생각하거나 억지로 떠올리려 하지 말고, 강제 없이 느슨하게 흔들리는 주목만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26­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기 위한 “도취를 통해 느슨해진 자아”는 정신 내부의 타자를 소환하는데도 필수적이다.27­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문은 이를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초현실주의. 남성명사. 순수 상태의 심리적 자동운동으로, 사고의 실제 작용을, 때로는 구두로, 때로는 필기로, 때로는 여타의 모든 수단으로, 표현하기를 꾀하는 방법. 이성이 행사하는 모든 통제가 부재한 가운데, 미학적이거나 도덕적인 모든 배려에서 벗어난, 사고의 받아쓰기.28­

이 방법이 목표로 하는 건, 우리가 알프스의 요양원에서 목격한, 탁자 위 와인잔이 움직이며 문장과 시가 가꿈꾸듯이 저절로 만들어지는”들장면이다. 공교롭게도 『마법의 산』과 같은 해, 1924년에 출간된 『초현실주의 혁명』 1호 표지에는 이 장면이 재연된 사진이 실렸다. 방 한가운데 식탁보를 덮지 않은 작은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종이가 꽂힌 타자기가 있다. 그 앞에 시몬 칸이 오른손에 오페라 안경을 들고 앉아 영매 역할을 하는 로베르 데스노스를 바라보고 있다. 〈각몽 강령회〉라는 사진의 제목이 암시하듯, 깨어있는 데스노스가 꿈꾸며 발화하면 칸의 손가락이 타자기 자판의 문자들을 때려(buchstabiert) 종이에 기입할 것이다.



  1. 브뤼노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 황장진 옮김(사월의 책, 2023), 307. 

  2. 같은 책, 275-300. 

  3. 로렐 켄달, 『무당, 여성, 신령들』, 김성례, 김동규 옮김(일조각, 2016), 194, 196. 

  4. “가족을 부양하려고 평생 힘들게 산 남성은 자신이 그 결실을 즐겨 보기도 전에 죽었다는 슬픔을 드러낸다. 결혼 내내 가난했던 어떤 첫째 부인은 남편의 현재 부인이 편안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억울해한다. 조부모는 손주들의 탄생에 기뻐하지만 생전에 그 아이를 안아볼 수 없었음을 한탄한다.” 같은 책, 183.  

  5. 같은 책, 223, 241. 

  6. 브뤼노 라투르, 같은 책, 301. 

  7. 같은 책, 291. 

  8. Laurel Kendall, “Gods and Things: Is ‘Animism’ an Operable Concept in Korea?,” Religions, vol. 12(4), no. 283 (2021): 13. 

  9. 브뤼노 라투르, 같은 책, 284. 

  10. 이 이야기가 등장하는 『마법의 산』 제 7장의 제목이다. 

  11. 토마스 만, 『마의 산(하)』, 홍성광 옮김(을유문화사, 2008), 617-618. 번역은 원문을 참조해 수정했다. Thomas Mann, Der Zauberberg (FISCHER Taschenbuch, 1988), 698.  

  12. Thomas Mann, 같은 책, 699. 

  13. 같은 책, 701-702.  

  14. 같은 책, 705. 

  15. 앙리 베르그송, 『정신적 에너지』, 엄태연 옮김(그린비, 2019), 70.  

  16. 같은 책, 92.  

  17. 소설 속 크로코프스키의 모델로 추정되는 스위스 정신의학자 테오도르 플루노이는 영매 헬렌 스미스와 함께 한 연구를 1900년 『인도에서 화성까지』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Tessel M. Bauduin, Surrealism and the Occult: Occultism and Western Esotericism in the Work and Movement of André Breton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14), 42. 

  18. Thomas Mann, Der Zauberberg, 706-707, 712. 

  19.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일월서각, 2013). 87. 

  20. 같은 책. 68. 87. 

  21. 브뤼노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 278. 

  22. 같은 책, 302-303. 

  23. Tessel M. Bauduin, Surrealism and the Occult, 35-36. 

  24. “또 다른 운명적 만남이 1934년 5월 29일 저녁에 일어났다. 브르통은 ‘꽃이 핀 밤나무 위의 밝은 비’의 머리카락을 지닌 어떤 미지의 여인과 만났다. 이어서 파리, 특히 레 알 구역의 좁은 거리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밤 산책을 하였다. 며칠 후에 브르통은 이 만남의 상황들이 1923년 8월 26일 쓰인 자동기술적 시 「해바라기」에 나타나 있음을 인식한다. 「해바라기」의 31행을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브르통은 이같이 결론짓는다. 1923년의 이 시 전체가 ‘1934년의 나에게 보다 중요한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조르주 세바, 『초현실주의』, 최정아 옮김(東文選, 2005), 91.  

  25. 앙드레 브르통, 『나자』, 오생근 옮김(민음사, 2008), 33. 

  26. Thomas Mann, Der Zauberberg, 713, 715. 

  27. Walter Benjamin, “Der Surrealismus: Die letzte Momentaufnahme der europäischen Intelligenz” (1929), in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vol. II-1, ed. Rolf Tiedemann and Hermann Schweppenhäuser (Suhrkamp, 1977), 297. 

  28.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선언』, 황현산 옮김(미메시스, 2012), 89-90. 


본 저작물은 2025년 10월 발간 예정인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5)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본 저작물은 저자의 동의 하에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웹사이트와 e-flux 저널에 선공개됩니다. 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와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2025 필자, 저작권자,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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