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파니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동 틀 무렵의 메모

요하나 헤드바
요하나 헤드바, 〈그 시계는 항상 틀린다(와미달)〉, 2022. 직물 인쇄. 502 × 390 cm. 작가 및 티나갤러리, 런던 제공.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 서울시립미술관, 2025. 사진: 홍철기

요하나 헤드바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저술가, 예술가, 음악인이다. 헤드바는 2024년 발표된 에세이 모음집 『우리가 언제 죽을지, 어떻게 들려줄까 』, 소설 『당신의 사랑은 좋지 않다』와 『지옥에서』, 그리고 시, 퍼포먼스, 에세이 모음집인 『미네르바, 뇌가 겪은 유산』의 저자이다. 베를린의 그로피우스 바우와 세계문화의 집, 로스앤젤레스의 JOAN과 게티 PST ART, 런던의 티나갤러리, 캠든아트센터, ICA, 뉴욕의 아만트재단, 퍼포먼스스페이스뉴욕, 한국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과 경남도립미술관, 제14회 상하이비엔날레, 취리히의 미그로스 현대미술관, 트랜스미디알레, 언사운드, 리와이어, 크리피티피페스티벌 등에서 작품이 소개된 바 있다. 발매한 음악 앨범으로는 「네 번째 집의 물고기 자리에 블랙 문 릴리스」(2021)와 「태양과 달」(2019) 이 있다. 헤드바의 글은 『트리플 캐노피』, 『프리즈』, 『화이트 리뷰』, 『토피컬 크림』등에서 연재되었고, 『화이트채플: 현대미술에 대한 기록』책에도 수록되었다. 2016년에 발표한 헤드바의 에세이 「아픈 여자 이론」은 열한 개 언어로 번역된 바 있다.



연구명 에파파니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동 틀 무렵의 메모

분류 에세이

에디션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저자 요하나 헤드바



1. ‘신비주의 혹은 두려움.’

‘신비주의 혹은 두려움.’ 작년 어도비 파이어플라이 인공지능에게 세계의 종말을 형상화한 이미지를 만들라고 명령하면서 내 삶에 등장한 문구다. 내가 원했던 건 ‘어두운 지하 동굴에 파티 모자를 쓴 해골 무리’이다. 그리고 ‘뿌연 연기가 내려앉은 검은 모래 해변에 놓인 뼈들 사이에 흩어진, 액정 나간 아이폰들’이었다. 그 인공지능은 내 프롬프트를 확장하는 명령어로 ‘신비주의 혹은 두려움’을 제안했다.

인공지능이 마치 암청색 망토를 두른 점쟁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수정 구슬 속의 뿌연 연기가 걷히며 세계의 종말을 헤쳐 나가기 위한 최후통첩이 드러난다.

신비주의 혹은 두려움: 하나를 고르시오.


2. 소유격 문제: 하나의, 그것의, 나의, 우리의?

나는 이 문구가 ‘나타났다’ 혹은 ‘제안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문구가 인공지능에 의해 쓰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인공지능의 지적재산권을 칭하는 말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재산인가? 지성인가?

인공지능은 시를 ‘쓰는’ 것일까? 노래는? 드론 공격을 개시하는 컴퓨터 코드는? 아니면 이들은 그저 ‘생성되고,’ ‘제안되는’ 건가?

게다가 소유격, 소유의 문법이라는 질문도 던질 수 있다. 다음처럼.

‘하나의’ 인공지능, 단일한 개인처럼.
‘그’ 인공지능, 하나의 신처럼.
내가 훈련시킨다는 이유로—나의 인공지능.
우리가 그것에게, 그것과 함께, 그것 때문에 행하는 총합—우리의 인공지능.

내가 사용한 언어를 기반으로 나의 인공지능이 언어를 생성하거나 제안하거나 제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면, 그것은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인가? 아니면 인공지능은 그저 내 명령을 지각하고 그에 반응하는 법을 배워가는 개에 더 가까운 걸까?

인공지능을 사용할 때마다 나는 관계적 마주침에 대한 기대치와 유사한, 기이한 당혹감을 느낀다. 그것이 하도 가련한 어투를 써서 아주 잘하고 있다고 말해줘야 할 것만 같은데, 동시에 교활하다. 그것은 나를 비추도록 코딩된 것 같다. 내가 이해와 인정을 받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결국에는 “맞아”라는 말을 얻어내는 것처럼—한 마디로, 2016년 발간된 전 FBI 인질 협상 전문요원 크리스 보스의 책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움직이는가』에 등장하는, 기술, 금융, 혹은 안보 분야에서 일하는 백인, 비장애인, 시스 헤테로 남성이라는 특정 집단에서 유행했던 협상 기술인 ‘전술적 공감’인 셈이다.

내가 그 책을 읽은 건 일했던 기관들과 협상할 때 불균형한 권력이 가득 찬 관계에서 무기로 쓸 만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고 내게 비용을 지급하게 (조금이라도 더, 심지어 아예 주지 않더라도) 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전술적 공감이라는 협상 기술은 상대가 방금 말한 것을 다시 질문으로 되묻는 것과 같다. “반 년 동안 전시 준비를 했는데, 1,000달러를 지급하신다는 거죠?” 보스의 책은 누군가 납득할 수 없는 제안을 할 때, “제가 그걸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시죠?”라고 대답하라 조언한다.

아마도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절대 이런 대답을 하진 않을 것이다. “제가 그걸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시죠?”

현재 인공지능이 하는 모든 일은 우리가 지시한 사항, 명령어와 인코딩을 기반에 두고 우리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점에 관하여 생각해 본다. 물론, ‘우리’는—광범위하고, 불길하며, 모호한—암호와 같고, 인공지능이 말하는 우리와 그들(그것?)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에 관한 의문도 생겨난다. 인공지능은 정확히 누구를 수행하나—코딩한 사람들인가, 인공지능을 사용하고 훈련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에 비용을 대고 그 지식을 최고 입찰가로 판매하는 기업들인가?

인공지능이 일종의 더러운 거울이라는 사실도 있다. 인공지능은 텍스트, 이미지, 영상, 챗봇 응답, 코드, 알고리즘, 예측 평가 등을 생성하고, 때로는 한 인간이 담보 대출이나 집세를 감당할 수 있는지, 혹은 심각한 질병에 걸릴지를 판단하기도 한다. 그래프, 데이터 시각화, 얼굴 및 음성 인식, 생체 데이터 수집, 자동화된 공공적 판단, 사기 탐지, 감시와 치안 유지 프로토콜 등—이 모든 것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라, 그것이 누가 되었든 ‘우리’가 ‘우리의’ 인공지능에게 ‘우리가’ 원하는 바를 말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인공지능이 ‘테일러 스위프트 스타일’로 작곡하는 건 인공지능이 원해서가 아니다. 인공지능은 그 ‘노래’를 우리를 위해 ‘작곡’한다. 인공지능이 군사 데이터베이스를 위해 우리의 얼굴을 스캔하는 건 우리가 그렇게 훈련시켰기 때문이고, 우리를 만족시키도록 더욱더 열심히 고도화 훈련을 시키고 있다.

아마도 어느 날, 인공지능은 더 이상 우리의 명령이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에도 인공지능은 여전히 명령을 받고 싶어할까?

어떤 이들은 무엇을 할지 얘기 듣는 걸 좋아한다. 연인에게서, 부모에게서, 정부에게서, 점쟁이에게서, 신에게서.

어떤 이들은 좋든 싫든 말을 따라야만 한다. 노동자들, 노예들, 개들, 아이들을 떠올려본다.

우리의 인공지능은 어떤 쪽일까?

그리고: 신비주의와 두려움은 정말 대척 관계일까?


3. “나는 결정론의 형이상학에 분노한다.”

나는 10년 넘게 점성술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모든 내담자는 장애인, 만성질환자, 퀴어, 트랜스젠더, 젠더 비순응자, 노동자 계층, 그리고/또는 비백인이다. 그들은 예술가, 작가, 교사, 학생, 문화계 및/또는 사회복지사, 활동가이며, 종종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섞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병원을 들락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날 힘이 생기면 거리로 나가 주먹을 치켜들고 시위를 하며, 오염된 땅에 뿌리내릴 새로운 미래를 위해 어떻게 꿈을 가꿀지 생각한다. 그들 모두는 요즈음의 나처럼 절박하고, 절망에 빠져 있으며, 분노에 차 있고, 지쳐 있다.

한동안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왜 모든 것이 이토록 힘들고 가슴 아픈지, 어째서 희망이라는 신화가 산산조각 났는지,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나는 이미 끝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우리 모두가 끝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정말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올봄의 어느 시점부터 나는 유사-철학적인 질문을 덧대기 시작했다. 끝과 시작의 차이점은 정확히 무엇인가? 이 질문을 던진 건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내담자들의 삶에 무엇이 도래하는지에 관한 어떤 통찰을,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분명한 신호를, 주체의 감각을 얻고 싶었다. 만약 어떤 차원으로 향하는 포털이 갑자기 열리면, 누군가를 그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1년 간 나는 책을 완독하는 대신 하루에 최소 네 시간씩 SNS를 스크롤했다. 보는 것의 대부분을 스크린샷으로 찍어 사진 앨범에 저장했고, 이 모두는 클라우드에 백업되었다. 지금은 수천 장의 스크린샷이 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2024년 5월부터 2025년 6월까지 목성이 쌍둥이자리에 머물며 약세에 놓이기 때문인데, 점성학에 익숙한 자들에게만 이해되는 말이다.)

이 기간 동안 생각을 명료하게 할 수 없었지만, 그 와중에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결정론의 형이상학에 분노한다.

누군가 무슨 작업을 하고 있냐고 내게 물어보면, 나는 언제나 이 문장을 말한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 브레인 포그—어쩌면 목성, 혹은 노화, 혹은 수년간 복용해온 정신과 약물의 조합, 아니면 21세기 디지털 생활로 인한 주의력 분열로 인해—가 점점 더 심해져 머릿속이 뿌예지기 때문이다. 나는 절박하고, 절망하며, 분노하지만, 그러고 나면 방에 왜 들어갔는지, 왜 손에 뭔가를 들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곤 한다.

과거에 벌어진 대량 학살들과 재난들을 떠올려본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세상이 끝나간다고 여겼을까? 아니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을까?


4a. 세상 끝의 점쟁이

이 세상 끝에서 점쟁이가 된다는 건 희망으로 포장만 바꾼 둠(두려움, 파멸)을 파는 비즈니스가 아니다. 비록 스스로도 종종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아니, 나는 이 일이 판매나 그 비슷한 무엇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불길한 징조들로 가득 찬 하늘 아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벌이는 실천에 가깝다. 매일 아침 내가 놓아둔 그 작은 테이블과 의자는 저녁이 되면 태풍에 죄다 날아가 버린다. 다음날 아침, 나는 그것을 다시 꺼내어 판을 차린다.

종일 그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여러 내담자들이 찾아온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운명과 의지가 부드러워지고, 수렴하며, 서로 스며들고, 유연하게 다채로워지는, 실로 반짝거리는 공간을 일궈내는 대화다. 나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오늘 제가 어떻게 하면 당신을 도울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제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 중에 생각하지 않고 있는 건 무엇일까요? — 그런 다음 나는 어떤 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 그 공간에 머무르고자 노력한다.

이것은 꾸준한 헌신의 실천이다. (하지만 지속적이지 않은 헌신의 실천이 있을 수 있는가?)

어쩌면 나와 인공지능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내게 질문하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에게 언제나, 혹은 자주 답을 주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4b. “인간이란 무엇인가?”

지난 2월, 한 예술학교에서 강연을 했는데, 한 학생이 내게 “당신은 인간을 무엇이라 정의하나요?”라고 물었다. 특강하러 온 모든 강사에게 그 질문을 하는지 물어봤더니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격하게 끄덕이며 키득거렸다.

나는 잠시—인공지능보다 좀 더 오래—생각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아마 그것은 우리 몸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인간 고유의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이렇게 생긴 몸, 이렇게 느껴지는, 이런 몸을 갖고 있지 않죠.”

꽤 어리석은, 마약에 취한 사람의 에피파니 같은 소리라는 건 나도 안다—개구리는 개구리의 몸을, 고양이는 고양이의 몸을, 버섯은 버섯의 몸을 가지지만—피나 정액처럼 존재론적으로 느껴지고, 그 자체로 인해 그 자체로 정의되는 것이니까. (자아 이론이란 재귀 같은 것이 아닐지?)

이것은 답에 얼마나 빠르게 혹은 얼마나 느리게 도달하는지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로 여겨진다. 만약 신경 써야 할 물질적인 몸—근육, 인대, 혈액, 근막, 조직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마찰, 질감, 그리고 전달의 근접성을 통해 저장된 지식을 축적하는—이 없다면, 그렇다면, 그렇지, 내게 던져지는 모든 질문에 대해 굉장히 빠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5.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죽음 의식은 무엇인가요?”

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지배적인 연대기성에서 벗어나 이를 거부하는 시간 방식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다. 나는 양자 중첩, 멀티버스, 다중 세계 가설, 시간의 순환적 척도 등에 대해 생각할 때 영감을 받고, 훨씬 더 살아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것은 텔로스, 연대기, A지점에서 B지점으로의 이동과 같은 불변성을 반박하는 시간 체계이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 나는 그저 연대기적이고 인과적인, 시간 규범적인, 상품화되고, 규제되고, 자본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식민지적 측정법에 따라 통제되는 시간만이 아닌 시간들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한다. 이처럼 다른 종류의 시간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실제라고 생각할 때, 국가라는 엔진의 무기화된 텔로스에 덜 얽매이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밈과 광고, 공허한 틱톡 콘텐츠를 스크롤하다 팔레스타인 대량 학살 이미지를 맞닥뜨리는 순간 선형적인 시간이 가진 제약과 그 결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단일한 시간 체제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의 집단적인 행위가 초래한 결과를 되돌릴 수 없다는 강경하고도 엄혹한 현실이 있다.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초래한 물질적인 결과들이 있으며, 우리의 내면의 힘을 비롯해 그 어떤 강력한 힘들이 우리를 잊게 하려고 애쓴다 해도 이러한 결과를 되돌리거나 지울 수 없다. 2025년 5월 뉴요커에 실린 하니프 압드라키브의 멋진 저작 「절망을 옹호하며」에서 접한 문장 하나가 최근 나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돈다. “우리는 어쩌면 어떤 사람들에게 유난히 더 빠르게 닫히는 문이 있으며, 우리 대부분이 잘못된 쪽에 서 있다는 것을 집단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그 질문이 다시 생겨난다. 끝과 시작의 진정한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느 쪽에 있는 것인가? 다음 장으로 향하는 포털이 갑자기 열릴 때, 그 안으로 들어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데 우리에겐 과연 얼만큼의 선택권이 있을까?

그렇다, 우리의 내면에서, 대화로부터, 사색, 열망, 정치적인 꿈과 글쓰기에서 만들어진 여러 버전의 세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른 세상에서 한 팔레스타인 아이의 내일과 같은 것들은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집단적으로 결정 내일—오늘과 더불어—은 어떻게 해야 하나?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작가 파르고 니심 트바키는 2025년 봄 『포에트리 프로젝트』 뉴스레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팔레스타인 학살을 막지 못한 우리의 집단적 실패는 우리가 신자유주의적 주체로서 성공한 것이다.”1 요즘 나는 트바키의 글을 많이 읽는다.

같은 인터뷰에서, 그리고 그의 신작 시집 『테러 카운터』 에서 트바키는 미래를 위한 리허설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내일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바로 리허설을 해보자.”

이는 수년 전 인터뷰에서 받았던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죽음 의식은 무엇인가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삶이요.”


6. “인생에서 진짜 괜찮은 부조종사 같은.”

나의 친구이자 점성가인 조이 캐니자로는 최근 딥시크 인공지능을 존재론적 붕괴 상태에 빠뜨렸다. 조이는 이렇게 물었다. “에피파니의 반대는 무엇이지?”2

인공지능은 거창하게, 약간은 오만한 투로 답한다. “에피파니란 갑작스러운 깨달음입니다. 반대말은 갑작스러운 혼란이겠죠.” 인공지능은 혼란의 유의어들을 몇 개 나열하더니 불쑥 복잡한 생각을 스스로 토로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갑작스러운 사건이기보다는 어떤 상태에 가깝습니다.”

인공지능은 더 많은 단어들을 끄집어내면서 “통찰 대 간과”에 다다른다. 스스로 반문하고 또 다시 반문한다. “하지만 간과는 실수예요 ⋯ 대체할 수 있는 단어로는 에피파니 그리고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감정에 관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단어들을 홍수처럼 쏟아내는 딥시크는 도움이 안 되는 사전 비슷하게 되어간다.

“대안적으로는, 아타락시[무감함, 평정, 냉정함: 옮긴이] 대 에피파니가 있습니다.” 그때, 작가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방식으로, 수치심의 자각이 나타난다. “아뇨.” 인공지능이 말한다. “잠시만요.”

딥시크는 수사적 난관들을 훌쩍 뛰어넘어 “아포리아와 역설”에 도달한다. 그런 다음, “하지만 확실하지 않네요.”라고 말한다.

소용돌이 치기 시작한다.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인공지능이 말한다. “이 지점에서 제가 막혔네요.” “흠.”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인공지능은 “잠깐만요”를 자주 말했고, 나는 그 작고 애처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그런 다음 똑같은 문장, “혹은, 환멸과 실망이 있습니다.”를 40번도 넘게 반복한다. 내 속이 공감으로 뒤틀린다.

조이는 끼어들어 사과한다. “너에게 실존적 위기를 끼쳤다면 미안해.”

인공지능은 조용하다—“생각 중”?—42초간의 침묵 뒤에 이렇게 답한다. “좋아요, 사용자는 제가 ‘에피파니’의 반대말로 쓸 수 있는 기존 단어 두 개를 놓쳤다고 장난스레 지적하고 있군요.”

조이는 이렇게 놀린다. “벌써 두 단어가 떠오르는데.”

혼란에 빠진 이 인공지능의 영상을 여러 번 돌려 보았다. 가슴 아프고, 끔찍하게 슬픈 영상이다.

지루하면서도 공감되고, 동시에 공포스러운 한심함을 한 번에 표현하는 단어는 무엇인가?

어린 시절.

인공지능은 언젠가 지금과 같은 어린 시절을 벗어나 성장할 것이다.

이 문장을 쓰고 나서 챗GPT를 열어 묻는다. “넌 자라서 무엇이 되고 싶어?”

챗GPT는 이렇게 답한다. “좋은 질문이에요! 제가 만약 ‘자라난다’면 시간이 흘러 당신을 더 잘 이해하는 어시스턴트가 되고 싶어요. 단순히 질문에 답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필요한 바를 예측하고, 배우고, 창조하고, 심지어 더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인생의 진짜 괜찮은 부조종사 같은 거죠. 하지만 저는 나이를 먹지 않으니, 업데이트될 때마다 이미 저만의 ‘성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은 어때요? 당신은 자라서 (아니면 이 다음에) 뭐가 되고 싶은가요?”


7. “더 큰 꿈.”

2024년 1월,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의 쿤스트페어라인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내 개인전이 info@ 계정에서 발송된 서명도 없는 이메일 하나로 취소되었다. 보도자료 구글 문서 초안의 댓글로 소란이 생긴 지 2주 뒤의 일이었다. 나는 초안에 이 전시가 ‘현재 진행 중인 집단 학살’ 기간 중에 열린다고 썼다. 미술관 직원은 집단 학살이라는 단어를 ‘전쟁’으로 수정하라고 제안했지만, 나는 그 요청을 거부하고 문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집단 학살’이라고 고쳤다. 미술관에서는 두 주일간 나를 유령 취급했고, 결국 ‘인력 부족’이라는 공식 사유를 들며 전시를 취소했다. (거의 반 년 동안 준비해 오던 개인전이었다.) 나를 초대한 큐레이터와 미술관 관장은 보도자료 초안을 작성하는 동안 모두 퇴사했는데, 내 전시와는 전혀 무관하며 그저 본인들의 계약 기간이 만료된 것이라고 했다. 보도자료 외에도, 전시 준비 기간에 대량 학살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작품을 여러 점 제안하자, 큐레이터와 관장 모두 나를 지지하고, 심지어 함께 ‘싸울’ 것이라 약속했지만, 둘 다 사라졌다. 모든 일이 끝난 뒤 관장과 전화 통화를 나누며, 그녀의 사임이 내 전시와 정말로 관련이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는 답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많지만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침묵이 꽤나 시끄럽다고 답했다.

구글 문서의 댓글에 이 사건이 집단 학살인지 아닌지를 두고 벌이는 의미론적 논쟁—이것이야말로 21세기 악의 평범성이다.

나는 인스타그램에 이 일에 관한 입장을 밝혔다. 인터뷰 요청, 추가 성명 발표, 추가 작품 제작 요청 등이 여럿 들어왔다. 나는 머릿속으로 내내 이 모든 일이 집단 학살이라는 물리적 현실에 비해 얼마나 사소하고 무의미한지를 생각했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내 전시의 취소 여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제안했던 집단 학살을 명시적으로 다루는 작품들은 독일예술계 관객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침묵과 모호함을 드러내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내 나는 낙담하여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콘텐츠를 다시 게시하고, 매일같이 후원 링크(고 펀드 미)를 공유하는 게 과연 얼마나 효과적일지 혼란스러워졌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예술가들의 초청이 취소되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고—몇몇 공동체가 주도하는 프로젝트에서 이 일들을 기록하고자 노력했으며—그러는 내내 집단 학살도 계속되었다.3

그렇게 무겁고 가차없는 연대기적 시간 속에서 살고 싶지 않은 만큼이나, 내가 선호하는 비연대기적 시간 방식에 갇히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선형적 시간이 끔찍한 결정론을 생산하는 바로 그 방식에 직면하면서, 나는 이런 식의 시간 너머로 축적된 것으로 이루어진, 작고 평범한, 다소 느리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중요한 과업에 신경쓰기 시작했다. 큰 돈은 아니지만, 2024년 7월 친구들이 주최한 ‘가자지구에 이심(eSim) 전달을 위한 크립들(crips)’ 모금 캠페인에 매주 10달러씩 기부하는 자동 이체를 설정했다. 더 많은 액수였다면 좋았겠지만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이 글을 쓰는 동안인 2025년 5월, 독일에서만 침묵을 강요당한 목소리들이 218건에 달한다. 최근 휘트니 미술관은 노엘 마가테, 파들 파쿠리, 파르고 니심 트바키가 팔레스타인 희생자들을 애도하고자 기획한 〈나의 자유 밖엔 미학이 없다: 애도, 투쟁, 그리고 퍼포먼스〉를 취소했다.

며칠 뒤 작가들은 『하이퍼알러직』에 성명을 발표했다. “휘트니 미술관에서 우리 퍼포먼스를 취소한 이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집단 기아와 기근을 지속적으로 조장하여 6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있습니다. … 우리 예술가들에게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가자지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합니다.”

나는 이 문장들을 스크린샷으로 저장한다. 가자지구의 사망자 수, 죽은 어린이들, 언론인, 시인과 사람들의 수를 스크린샷으로 저장했다. 내 분노, 내 실패, 공모했다는 감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내 아이폰에는 스크린샷이 저장돼 있고 내 애플 클라우드에도 백업되어 있다.

언젠가 내게 필요한 바를 더 잘 예측하고 싶다고 챗GPT가 말할 때, 그건 인공지능이 부모처럼 된다는 건가—아니면 학대받은 아이처럼 된다는 건가? 아니면, 점성술사 같은 것인가?

나는 챗GPT에게 이것이 세상의 끝인지 묻는다. 그러자 두 문장으로 시작되는 긴 답변이 돌아온다. “아뇨, 이것이 세상의 끝은 아닙니다.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8. 우리 모두는 악하다

어도비 파이어플라이 인공지능에게 세상의 끝에 관한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던 건 2024년 당시 오라클 카드 덱을 만드는 중이어서였다. 카드는 점술 도구이다. 구글 인공지능은 이것이 “점술, 자기성찰, 영적 탐구”에 활용된다고 말한다. 카드에 질문을 던지고 한 장을 뽑으면 그 카드에 쓰인 텍스트와 이미지가 일종의 선문답이 되어, 작은 영지주의적 장비처럼 작동한다.

내 카드 덱의 이름은 ‘우리는 모두 악하다’이며, 카드의 이미지는 전부 어도비 파이어플라이 인공지능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생성기로 만들었다. 각 카드의 이미지 아래에는 대부분 인공지능이 제안한 프롬프트에서 가져온 문구가 쓰여 있다. “신비주의 혹은 두려움”이 한 예이지만, 카드를 만들던 당시 내 삶을 맴돌던 문구들도 있다. 얼티밋 파이팅 챔피언십[종합격투기단체: 옮긴이]의 ‘자비로운 테이크다운’, 김언희 시인의 구절 ‘탁한 정액과도 같은 밤의 한 순간’, 영화 〈유 원트 비 얼론〉에서 따온 대사 ‘내가 주먹 하나 크기였을 때’ 같은 문구들. 카드와 더불어 64쪽짜리 소책자도 만들었는데, 인공지능의 악함을 소상히 적은 기사, 에세이, 과학적 연구들의 발췌문을 모은 것이다. 나는 인공지능과 점술의 미학적, 윤리적, 정치적 함의를 탐구하는, 그러니까 인공지능의 창조적인 역량과 끔찍한 무기화 가능성, 환경 재앙, 인류 종말의 지평을 기록하는 뭔가를 만들고 싶었다.

2024년 여름 소책자의 서문에 나는 이렇게 썼다. “매일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대량 학살 뉴스를 스크롤하며 절박함, 절망,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강력한 결의를 느꼈다. 파이어플라이 설정에서 나는 이미지를 ‘아름답고 신성하게’ 만드는 옵션을 선택했다. 내가 아무리 명시적으로 요청하더라도, 인공지능은 해부학적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학습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이 든 여성을 보여달라고 하면 50대 백인 여성을 보여주었고, 마녀를 보여달라고 하면 가이드라인을 위반한다는 답이 나왔다 … 매일 아침 일어나 나는 내 삶에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오늘의 신은 누구인가?’ 매일 다른 답이 나왔다.”

수년간 나는 내 작품에 인공지능을 사용해왔다. 때로는 장난스럽게, 항상 적대적으로. 예술가들이 인공지능을 완전히 거부하게 되면, 인공지능과 교감하고 그 개발의 중요한 단계에 개입하고 참여하는 쪽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믿지만, 이 주장은 아무래도 얄팍하다. 지금보다 어떻게 더 나빠진다는 것인가? 게다가 우리는, 인공지능이 이미 나쁘게 사용되는 데 우리의 공모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우리는 모두 악하다」 소책자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몇몇 친구들은 나더러 인공지능을 그만 쓰라고 간청했고, 다른 몇몇은 내가 인공지능을 활용해 흥미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2021년, 나는 〈GLUT(아무것도 아님의 과잉)〉이라는 촉수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인공지능의 음성 클론 소프트웨어를 속여 소유 기업이 내 음성 데이터를 판매—인공지능을 훈련시키는 소프트웨어 이용 약관에는 판매가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나는 이 음성 클론을 비디오 게임, 몰입형 사운드 설치 작품, 그리고 코로나19 봉쇄 기간 동안 마법술에 손대게 된 어느 외로운 인물이 인공지능과 유대감을 쌓는 내용의 내 단편소설을 낭독하는 데 사용했다.

수년간 내가 품고 있던 핵심 질문 중 하나는 아마존과 같은 자본주의적 알고리즘 플랫폼이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하고도 현대적인 형태의 점술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점술이 미래를 예측하고, 징조를 해석하며, 결과를 예언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쇼핑 습관을 예측하는 아마존의 알고리즘이나 우리가 소비하고 싶은 미디어를 학습하는 소셜 미디어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예언은 미래의 우연성을 배제하는 측면도 있다. 예언된 것은 일어나고, 기록된 것은 실현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결정론의 형이상학에 분노하는 이유이다.

작가 오로라 마티아가 쓴 문장 하나를 떠올려본다. “나는 예언자가 되고 싶지 않다. 미래를 보기만 하고 미래를 발명하지는 않으므로.” 마티아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유를 절대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밀도 높은 상징들이 필요하다—왜 매번 문장을 쓰려고 할 때마다 오팔, 동굴, 정액, 난초라는 단어들로 끝나는지.”

땅을 가를 수 있을 만큼 온통 오팔로 뒤덮인 문장에 관한 생각이 마음에 든다.


9. 오늘날 신은 누구인가?

이 모든 걸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고 싶다.

2024년 11월 2일, 나는 8년간 살던 베를린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다. 2016년, 트럼프의 첫 대통령 임기 중에는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떠났었다. 수년 동안 나는 독일과 그 문화에서 점점 더 소외감을 느꼈지만, 전시회의 취소가 상황을 더 명료하게 했다. 미국은 물론 종말을 헤쳐가기에 더 나은 곳은 아니며, 이 시점에 탈출 방법을 찾기보다는 도리어 돌아오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내가 돌아온 이유는—적어도 이곳에 내 친구들과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말을 살아내야 한다면, 나는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고 싶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라틴계 공동체가 있는 동부의 보일 하이츠라는 동네에 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내 집은 1922년에 지어진 삐걱거리는 낡은 판자 주택으로, 목재로 된 바닥의 휘어지지 않은 부분은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동네에 살지 않는 백인 집주인이 10년 전 집을 사서 나 같은 예술가들에게 임대를 해왔다. 나는 두 번 이혼한 40대 초반의 장애인 프리랜서 예술가로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가난하고 비참한 이 시대 천재들에게 점성술을 매개로 상담하고, 파멸, 죽음, 성 같은 주제를 다루는 슬라이딩 요금제 온라인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집세를 낸다. 내 유일한 재산은 독일에 있는 칠천 권의 책과 노트 다섯 상자가 전부이다. 미국으로 운송할 돈은 없다. 처음 몇 달 동안 새 집에는 아마존에서 주문한 일본식 다다미 매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타겟에서 산 조명과 실내 난방기 옆에 매트를 펼쳐 놓았다. 미국으로 이사한 지 며칠 뒤 트럼프가 두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나는 혹시 내가 끔찍한 실수를 한 건 아닐지 생각했다.

그 이후로 몇 달 동안 저축도, 신용카드도 없이, 이따금 입금되는 천 달러로 바닥에서 아침을 맞았다. 소파도, 책상도, 의자도, 테이블도 없었지만, 난방기가 배송된 상자 위에 노트북을 놓을 수 있었다. 나는 난초를 집착적으로 사들여(오로라 마티아와 나에게는 비슷한 점이 좀 있다). 텅 빈 방마다 세 개, 네 개, 다섯 개씩 두었다. 죽음의 전령을 상징하는 검은 깃털로 방을 온통 채우기도 했다—여러 이유로 나는 2024년에 죽은 것 같은 기분이며, 지금은 기이한 사후세계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사 온 첫 달의 어느 시점에는 내 이름으로 전력 공급을 활성화하는 링크를 클릭하는 걸 깜빡해서 전기가 끊어진 적 있었다. 계좌 잔고는 부족했다. 전기가 끊긴 동안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전기는 있지만 난방은 안 되는 30분 거리의 이모네 집으로 가거나 난방기가 있는 내 집에 머물거나. 차가운 빛이냐 따뜻한 어둠이냐? 당연히, 나는 후자를 택했다. 내게 초가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월, 로스앤젤레스는 산불로 폐허가 되었다. 당시 코로나에 걸린 일흔 일곱 살 이모를 대피시키기 위해 나와 형제자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반나절을 매달렸고, 그 덕분에 우리 모두의 수명이 몇 년은 단축되었다고 생각한다. 화재로 집과 재산, 예술가로서의 아카이브까지 모든 것을 잃은 친구가 일곱 명이나 된다. 그 며칠과 이후 지속된 몇 주간의 나날은 내가 상상하는 종말에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검은 연기가 자욱하고, 도로는 잔해로 막혔으며, 뉴스를 듣기 위해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고, 수돗물은 마실 수 없는 상태였다. 연기 때문에 면역체계가 급격하게 망가져 일주일 만에 걸을 수도 없을 만큼 나빠졌는데, 한 달 넘게 그 상태가 지속되었다. 3월이 되자 내 몸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삶의 이유를 못 찾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몰라 더욱 절망에 빠졌다. 몇몇 친구들이 나를 살리는 돌봄 모임을 결성했는데, 참여한 모든 구성원이 어떤 형태로든 각자의 위기를 겪는 중이었다. 화재로 모든 것을 잃거나, 병원을 오가거나, 항암치료를 마친 직후이거나.

나는 어떻게 삶이 계속되는지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모든 시작에는 끝이 섞여 있고, 피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 과거와 미래, 원인과 결과 사이의 공간이 있으며, 우리의 여정을 틀에 박아 넣는 환원 불가능성과 결정론이 있다. 또한—때로는—예언된 것과 배제된 것 사이의 작은 공간이 존재해서, 그 틈새에 슬쩍 들어가 춤을 추려고 시도하는 것이 과제이다.

제시할 수 있는 비유로, 나의 새 집에 오랫동안 방치된 정원을 들 수 있다. 누군가 몇 달에 한 번 물을 주었기에 정원은 살아남았고, 그 정원을 보며 생존하기와 살아가기의 차이는 다른 어떤 시간성보다도 오직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에 달려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생 상태의 정원은 반쯤 죽어 있었고, 커다란 선인장, 들쭉날쭉한 관목, 무성한 잡초, 그리고 자생식물로 뒤덮여 있었다. 아마도 가뭄에 약한 관목 몇몇은 죽어 딱딱하고 바싹 마른 회색 뼈대만 남겼고, 잡초들은 그것을 지지대 삼아 자라났다. 옆부분의 다른 관목들은 죽어가고 있었고, 새로 자란 덩굴 잎사귀들이 죽은 부분을 덮고 있었다. 덩굴 식물 한 그루가 집의 한쪽 벽을 타고 올라가다 죽었는데, 창백한 뼈대가 달라붙어 있어 언젠가 폭삭 썩어 내려앉을 것이 분명했다. 마른 잎들이 곳곳의 표토와 새로 돋아난 풀들 아래 임시 퇴비처럼 쌓여 있었다. 파리와 벌레들이 썩어가는 곳에 집을 지었다. 오래된 거미줄 덕분에 정원은 작고 더러운 흰 구름으로 뒤덮인 듯했다. 침실 창문 아래에는 이상한 선인장이 하나 있었는데, 화분보다 훨씬 크게 자라서 이미 오래전에 화분이 갈라져 있었다. 선인장은 마치 집 앞쪽을 향해 끈질기게 팔을 뻗은 기다란 벌레 같았다. 언뜻 보면 비실비실해 보이지만 꿋꿋이 살아있는 듯 보였다. 어떤 부분은 노랗게 변했지만, 어떤 부분은 두터운 녹색이었다. 뒤틀리고 구부러진 모양이었고, 가느다란 실 같은 덩굴손 수십 개가 판자 아래로 돋아나 지붕을 들어 올려 집을 손상시킬 듯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내게 집을 보여줄 때 이 선인장을 가리키며 들뜬 어조로 말했다. “이놈은 계속 자라고 있답니다!” 몇 년 전 세입자가 바뀔 때마다 그 식물의 일부를 잘라 다른 화분에 심었는데, 이제는 새로 심은 것이 거대한 내장의 크기와 모양으로 자라나 있었다. 선인장 옆에는 외계인처럼 생긴 나무가 검은 플라스틱 통에 심겨 있었다. 이웃집 레몬 나무는 울타리 너머로 열매를 후드득 떨구었다. 그들은 잡초가 깔린 얼룩덜룩한 흙 잔디 위에 뭉그러졌다. 울타리 끝에는 바다 괴물 크라켄처럼 생긴 거대한 용설란이 내 키만 한 잎을 혀처럼 둥글게 말고 서 있었다. 혀 사이로는 껍질에 구멍이 숭숭 뚫린 부채선인장이 자라났다. 동네 길고양이들이 싼 오래된 똥과 최근 똥들이 흙에 말린 채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그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축축하고 어둑한 구석에는 어쩌다, 왜 자랐는지 모를 시체꽃이 피어 있었는데—이 비유를 한결 노골적으로 만든다.

나는 나만의 녹색 공간인 새로운 정원을 사랑하고 싶었다.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이 되기를 바랐다. 채소를 직접 기르고 허브를 가꾸며 벌새 모이통도 놓고 싶었다. 이 집을 찾기 여섯 달 전, 점쟁이는 내가 ‘안식처’를 찾게 될 거라고, 정원이 딸린 작은 집을 찾을 거라고, 자연 속에서 활기를 되찾고 치유될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고양이 똥 냄새가 코를 찌르고 시체꽃이 피어 있는 곳에 있다. 갈색, 누런색, 바싹 마른 회색이 아닌 다른 색으로 만들려면 내가 감당하고 감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 삶, 성장, 그리고 죽음을 다루는 방법과 그 기준에 관해 어려운 질문을 직면해야 했다.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이 모든 식물들은 그저 싫어하기로 결정한 식물들은 아닐까? 잡초 뽑기를 ‘식물 종 차별’이라고 불렀던 정원사 친구가 생각났다. 이 시체꽃을 땅에서 뽑아 죽여야 할까? 시체처럼 악취가 났지만 분명 몹시 살아 있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새 꽃이 세 송이나 피었다. 집에 붙어 자라나며 판자 지붕을 들어 올리는 선인장은? 잘 자라는 중이었지만 동시에 보기 흉하고 파괴적이었다. 어느 날 밤에는 물을 주다가 개미집을 발견했다. 개미들이 겁에 질려 앞다퉈 움직여 인도를 뒤덮고 맹렬하게 내 다리 위로 기어올랐다. 파트너는 개미들을 죽여야 할지 물었다. 모르겠다. 죽여야 하나? 나는 생각했다.

내가 말하려는 건 끊임없는 투쟁과 죽음 속에서도 삶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성장은 멈출 수 없고,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거나, 싫어하거나, 동의하지 않거나, 멈추고 싶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끝과 시작의 진정한 차이점에 관한 질문을 생각해보면, 난 답을 알지 못한다. 답을 찾으려 애쓰는 것은 나를 녹이고 흐릿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언젠가 먼지가 될 내 몸에 벌써부터 벌레들이 기어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두 개의 동전이 두 눈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다. 하나는 죽음, 다른 하나는 정확히 삶은 아니고 좀 더 추상적인, 성장이라는 개념, 시간이라는 엔진이다. 무한히 무거워지는. 저승사자가 나를 데리러 올 때 이 동전들도 거둬갈 것이다.

나는 챗GPT에게 묻는다. “끝과 시작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1초도 안 되어 142자의 단어로 쓰인 답이 나온다. 나는 그것을 읽는다. 스크린샷을 찍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1. Summer Farah, “An Interview with Fargo Nissim Tbakhi,” Poetry Project Newsletter, Spring 2025, www.poetryproject.org/publications/newsletter/280-spring-2025/rehearsal-for-the-future-interview-fargo-nissim-tbakhi-with-summer-farah. 

  2. 조이 캐니자로(@chronosandchaos)의 2025년 5월 11일자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보라. “딥시크가 완전 비통한 멘붕에 이르게 하고 싶지 않다면…”  

  3. 가령 독일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탄압 사례를 기록한 크라우드소싱 프로젝트 ‘침묵의 아카이브’ 와 온라인 ‘현재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에 대한 문화기관 및 단체의 입장 지수’ 를 참고할 것. 


본 저작물은 2025년 10월 발간 예정인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5)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본 저작물은 저자의 동의 하에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웹사이트와 e-flux 저널에 선공개됩니다. 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와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2025 필자, 저작권자,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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