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모토(大本)에 대하여: 알렉산드라 먼로와의 대화

알렉산드라 먼로 박사는 예술과 문화, 기관의 글로벌 전략을 중점으로 활동하는 수상 경력의 큐레이터, 아시아학 학자이자 저자이다.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및 재단에서 글로벌 아트 분야의 시니어 큐레이터 앳 라지로서, 구겐하임의 아시안 아트 이니셔티브를 이끌고 구겐하임 아부다비 프로젝트의 시니어 파운딩 큐레이터를 역임하고 있다. 먼로는 40회가 넘는 전시를 기획하며, 차이궈창, 모리야마 다이도, 쿠사마 야요이, 이우환, 무신, 오노 요코 등의 예술가들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와 구타이, 모노하, 일본 오타쿠 문화, 중국 개념미술과 같은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들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했다. 대표적인 전시로 구겐하임에서 열린 ⟪1989년 이후의 예술 그리고 중국: 세계의 극장⟫(2017)을 책임 기획을 맡았으며, 『아트뉴스』는 이 전시를 지난 십 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전시 25중 하나로 선정한 바 있다. 또한 『뉴요커』는 ⟪위홍: 또 한 사람이 쓰러진다⟫를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톱 8 전시’ 중 하나로 꼽은 바 있다.
안톤 비도클은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며 『이플럭스(e-flux)』(뉴욕, 1998-현재)의 창립자이다. 광주비엔날레에 두 번 참여하며 2016년 ‘눈 예술상’을 수상했고,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개최된 여러 전시, 강연, 프로젝트에 참여한 바 있다.
오사카 코이치로는 도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큐레이터, 작가, 프로듀서이다. 그는 도쿄에 위치한 12평 규모의 전시 공간 ‘아사쿠사’의 설립 디렉터로, 큐레토리얼 협업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데 전념하고 있다.
안톤 비도클(이하 비도클): 알렉산드라, 당신은 1976년 데이비드 키드가 교토 가메오카(亀岡)에 설립한 오모토 일본전통예술학교의 첫 수련생 중 한 분이셨죠. 이 학교는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郎)가 공동 설립한 종교 오모토의 이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곳입니다. 《강령: 영혼의 기술》 에서 그의 특별한 찻잔을 선보이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전후 일본 미술에 관한 이해를 증진하는 데 큰 기여를 한 학자이자 큐레이터인 당신에게, 그때 경험은 경력의 기초가 되었다고 설명하셨죠. 우선, 오모토와의 개인적 관계에 앞서 오모토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알렉산드라 먼로(이하 먼로): 제가 배웠던 걸 떠올려 보면 오모토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1892년, 교토부의 아름다운 시골 지역인 아야베(綾部)에서 데구치 나오라는 가난한 문맹 여성이 어떤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겐 자신을 우시토라노콘진이라고 부르는 신이 내렸는데, 이 신은 세상을 재건하고 정화하라는 소명을 전하기 위해 그녀를 선택한 고대의 구원자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가르침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20만 장까지 달하게 되며, 신비주의자로 지역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이 글을 오후데사키(御筆先)1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자료는 신이 직접 전한 언어인 방언으로 적혀 있고 매개자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이야기엔 우에다 기사부로라는 늠름한 청년이 아야베에 도착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는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자 기적적인 ‘영혼 세계로의 여행’에서 돌아와 회복 중이었는데, 나오를 만나라는 계시를 느껴 아야베에 옵니다. 나오 역시 우시토라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될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오의 해독할 수 없는 필사본에 관한 우에다의 해석은 신흥 종교—더 정확히 말하면 신토(神道)의 한 종파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그 종파가 오모토이고 ‘위대한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두 사람은 나오의 계시와 우에다의 영적 능력을 융합해 긴메이레이학회라는 조직을 설립하였습니다. 기사부로는 나오의 딸 스미코와 결혼하여 데구치 오니사부로2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오니사부로는 근대 신토의 대단한 설교자이자 철학자 중 한 명으로 부상합니다. 그는 방대한 종교 및 신비주의 저술을 남기고, 수천 편의 일본 전통 시조 와카를 지었으며, 신사를 설계했고, 서예가이자 수묵화가였으며, 이 대화에서 앞으로 다루게 될 라쿠다완(樂茶碗)3의 열렬한 제작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거센 군국주의 내셔널리즘 시기에 거침없이 발언하는 보편주의자로, 오모토를 발판 삼아 위험한 정치적 위험을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일본에 등장한 신흥 불교와 신토 종파 중에서 오모토는 모계 중심 체제4라는 점이 이례적이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항상 여성으로, 나오로 시작하여 현재의 5세대 모계 후손이 그 역할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독특한 원칙은 바로 오모토의 영적 수행이 예술의 실천에 기반을 둔다는 점입니다.
비도클: 저는 예술을 출발점으로 삼는 다른 종교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먼로: “예술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라는 말이 정말 멋집니다! 오모토는 전통 예술, 특히 노극과 시마이춤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아야베와 가메오카에 있는 교단 본부엔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인 반쇼덴이라는 예배 장소가 있고, 여기 노극 무대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대성당 안에 완벽한 오페라 홀을 갖춘 것과 같습니다!5 이는 초기 신토의 수행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에는 야외무대와 신성한 숲 속의 예배 장소가 건축 양식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원래 신사에는 밀폐된 공간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자연 그 자체가 신과 교감하는 장소였습니다. 노극, 또는 그 이전에 있던 가구라춤은 탁 트인 하늘 아래에서 신들을 소환하는 제의의 춤이었습니다. 기도문, 피리, 북소리와 함께 매우 상징적이고 양식화된 춤을 추는 건 모두 영적 세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노극 연구자는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노는 유일하게 사후 세계에서 이뤄지는 연극이다”.
오모토는 또한 다도, 그와 관련된 도예, 서예, 꽃꽂이와 같은 예술을 가르쳤습니다. 교단 본부에는 아름다운 정원과 다실이 있어서 지도자와 신자들이 예배의 일환으로 그곳에 모이곤 했습니다. 아야베에는 천연염료로 염색하고 입체감을 가진 질감의 비단으로 만든 특유한 직물이 있는데, 오모토의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직물로 만든 ‘아야베 오비(기모노 허리띠)’를 착용합니다. 무술인 합기도는 오모토의 부흥과 관련이 깊고, 조화와 영성을 함양하는 전통 무예로 수행되었습니다.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장려한 또 다른 초기 오모토 신조는 인류를 하나로 묶는 세계 공용어로서 에스페란토라는 이상이었습니다.
이런 예술 형태들이 모두 몸으로 하는 수련이라는 점, 그리고 각각 수 세기에 걸쳐 다듬어진 동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오모토 안에서 이러한 예술을 배우는 것은 능동적인 명상의 형태였습니다. 신토의 의례 전통과 선불교 모두에서 영감을 받은 오모토는 다도, 서예, 합기도와 같은 예술을 우주의 에너지를 따르는 미학을 지닌 영적 수련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예술은 정화와 공양의 행위였으며, 주변 환경과 합일을 이루는 방법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건 만남과 교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전통 예술은 오모토 일본전통예술학교의 여름 세미나 커리큘럼 형태로 이어집니다.
비도클: 오모토는 왜 이십세기 초 수십 년 동안 박해를 받았나요?
먼로: 오니사부로는 평화주의, 보편적 인류애, 세계 종교 간의 통합을 거리낌 없이 옹호했으며, 제국주의 일본의 고조되는 군국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오모토는 초창기에 엄청난 신자를 가졌고, 오니사부로의 영향력과 명성이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 제국의 호전적 이데올로기를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1921년 정부는 오모토를 폐쇄하고, 신사를 파괴했으며, 오니사부로를 투옥했습니다.
오사카 코이치로: 정부는 왜 그를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을까요? 그가 미디어에서 오모토를 공표하는 방식 때문이었을까요? 혹은 그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때문이었을까요?
먼로: 오모토 조직은 다이쇼 천황과 쇼와 천황—국교인 신토의 지도자의 신성한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오니사부로는 종종 왕의 휘장을 차고 백마를 탄 채 사진이 찍히면서, 자신의 신적인 지위를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모토의 반군국주의와 국제주의적 정치 성향 때문에 1935년부터 전쟁 내내 이어진 2차 박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모토는 금지되었고,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다실, 노극 무대, 직물 작업장이 있는 교단 본부가 파괴되고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습니다. 오니사부로와 스미코는 천황모독죄(불경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육 년간 투옥되었습니다.
비도클: 이번 전시회에서 선보이는 찻잔은 오니사부로가 언제 만들었나요?
먼로: 일본학자 알렉스 커에 따르면, “오니사부로 생애 끝자락, 주변의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그는 라쿠다완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습니다.”6 1942년에 감옥에서 풀려나 가메오카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오모토는 여전히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격화되고 히로히토를 지지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지도자들이 비참한 패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아 절망이 깊어지는 가운데, 오니사부로는 내면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커에 따르면 1944년 12월, 오니사부로는 전쟁 마지막 해에 일본 주요 도시를 향한 미국의 폭격을 피해 교토에서 가메오카로 이주한 라쿠 도예가 사사키 쇼라쿠를 만났습니다. 쇼라쿠는 십오년 치 라쿠 도토를 가져왔습니다. 오니사부로는 감옥에 있는 동안 “천국을 표현하는” 찻잔을 만들 생각을 해왔고, 이것이 그의 기회였습니다. 오니사부로는 쇼라쿠의 가마를 사용해 1945년 1월에 첫 찻잔을 구웠습니다. 이듬해인 1946년 3월까지—십오 년 치 라쿠 점토를 모두 소진하고, 서른여섯 번 가마 소성을 거쳐 약 삼천 점의 찻잔을 제작했습니다. 그것들은 차완(다완)으로 알려진 평범한 찻잔이 아니었습니다. 태양이 폭발하는 것 같은 인상파 그림을, 손에 쥘 수 있도록 삼차원으로 묘사한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본 다완의 절제된 색조와 대조되는 오니사부로의 화려한 유약이, 가메오카의 산 너머로 펼쳐지는 불꽃놀이처럼 보였던 오사카 폭격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믿곤 합니다. 커의 말에 따르면, 오니사부로가 세상을 떠난 뒤 비평가 가토 기이치로가 이 찻잔들에 요완(耀盌 , 빛나는 찻잔)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다완을 이 이름으로 부릅니다.
비도클: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모토는 매우 영향력이 컸습니다. 오모토는 일본현대미술제도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영향을 미친 다른 운동들이 생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먼로: 네, 오모토에서 파생한 두 가지 주요 종교 운동이 있었습니다. 1926년 영적 치유사 오카다 모키치는 세계 메시아교를 창립했습니다. 유기농 먹거리의 건강상 이점에 대한 오모토의 믿음에서 영감을 받아, 일찍이 1936년부터 비료 사용을 거부하는 농업 시스템을 장려했습니다. 오모토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예술 작품이 영성을 함양하고 아름다움이 사람들을 통합하며 세계 평화를 이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1952년에 하코네미술관을 설립하고 1957년에 MOA미술관의 전신인 아타미미술관을 설립하는 등 뛰어난 일본 미술 컬렉션을 구축했습니다. 오늘날 이 미술관들은 일본 최고 미술관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다만, 이들은 예배 장소로서 기능도 합니다!
가장 최근에 파생한 단체는 1970년 고야마 미호코가 설립한 신지슈메이카이입니다. 고야마는 오카다 모키치의 사상을 한 단계 발전시켜, 자연에 대한 경외심, 질병 퇴치, 그리고 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예술과 아름다움에 관한 감상을 설파했습니다. MOA미술관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고대 중국,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는 물론, 모든 시대의 일본 예술품을 아우르는 훌륭한 고미술 컬렉션을 구축하고, 건축가 이오밍 페이에게 교토 외곽의 산 속에 건물 설계를 의뢰했습니다. 미호뮤지엄은 1997년에 개관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이러한 파생 단체들이 번성하는 반면, 오모토는 지지자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재도약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데이비드 키드라는 특별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도클: 키드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먼로: 1970년대 초, 십대 시절 삼 년간 고베에서 황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제약업계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일을 따라 그곳으로 갔고; 예술가인 어머니가 저희를 그곳에 머물게 했습니다. 당시 간사이 지역(고베와 인근 오사카, 교토 등을 아우르는)은, 수도 행정과 금융이 집중된 도쿄와 달리 국제 비즈니스와 제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간사이는 도쿄보다 훨씬 더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고베에만 해도 영국, 독일, 프랑스 학교뿐 아니라 예수회와 시크교도 학교도 있었습니다. 저는 1911년 루터교 선교사들이 롯코에 설립한 캐나다 아카데미에 다녔습니다. 이 아카데미는 외딴 지역에 교구를 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기숙 학교로 유명했습니다.
게다가 간사이는 UC버클리의 중국미술사학자 제임스 카힐이나 티베트학자 존 블로펠드처럼 장기 연구 여행을 온 세계 최고의 ‘동양주의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당시 중국은 1976년까지 지속된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어서 아무도 입국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이 중국 문명의 보고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이십세기뿐만 아니라 이전 세기 동안에도 중국 문화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죠. 일본은 오래전에 중국에서 사라진 관습이 일상생활의 일부로 남아있는 살아있는 보고였으며, 중국 도서관, 기록 보관소 및 소장품은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이런 맥락 속에서 지식인이자 예술가였던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데이비드 키드라는 미국인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데이비드는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1926년 미국 켄터키주에서 자동차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십 대 시절 위저보드(심령 운세 보드 게임)를 통해 중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잘생긴 게이였고, 미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죽었을 거라고 저에게 자주 말했습니다. 그러다 1946년, 그는 학업을 위해 베이징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문학 비평가 윌리엄 엠프슨과 그의 아내 헤다처럼 특별한 외국인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들은 비단잉어 연못에 알몸으로 뛰어들어 친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 그룹은 혁명가, 예술가, 신비주의자, 중국 고위 관료들과도 교류했습니다. 데이비드는 중국 대법원장 판사 가문과 결혼하여 옛 베이징 중심부에 있는 명나라 양식의 궁궐 같은 집에서 몇 년 동안 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뉴요커』에 기고하였고, 나중에 『베이징 이야기: 옛 중국의 마지막 나날』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데이비드는 중국 철학, 미학, 역사에 깊이 몰두하였습니다. 그는 장인어른에게서 배우며 문인 문화를 탐구했습니다. 그는 학자들의 기물이 어떻게 전시되고 사용되는지, 어떻게 절기와 용처를 나타내는지 관찰했습니다. 서양에서는 예술 작품을 벽에 걸어 두고 잊어버리는 것과 달리, 여기서는 송나라 궁중의 방식대로 예술이 하나의 사건이 되어—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작품을 펼쳐, 술, 시 낭송, 대화가 어우러진 집단적이지만 일시적인 행사로 감상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술품을 말아서 보관하였고, 그 순간은 사라지곤 했습니다.
비도클: 그리고 나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죠.
먼로: 맞아요.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베이징에 입성한 후, 데이비드는 많은 친구들이 붉은 중국 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혁명에 동참하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하지만 한 가지 사건이 그의 마음을 바꾸어 베이징에 머무르게 합니다. 그의 장인 서재에는 명나라 선덕제 시대의 특별히 중요한 향로가 있었습니다. 선덕제 시대 향로는 분쇄된 청금석과 다른 희귀 원소를 포함한 수백 가지 광물로 구성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향로가 특별했던 이유는 붉게 달궈진 작은 숯 위에서 나무껍질 조각이 타오를 때 향의 열기 속에서만 비로소 향로가 살아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서재에서는 이 온기가 약 사백 년 동안 이 유지되어 향로의 독특한 빛을 지속시켰어요. 어느 날, 집안의 한 젊은 하인이 향로에 물을 끼얹어 숯뿐만 아니라 향로의 정수 자체를 꺼뜨려 버렸습니다. 수 세기 동안 아름다움을 지켜주었던 내부의 온기는 사라져 다시 되살릴 수 없었습니다. 데이비드와 그의 아내는 가져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물건을 챙겨 중국을 떠났습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데이비드가 동아시아 문화의 생생한 경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물의 기능적 측면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형태나 물질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 내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상징하며, 문화적, 철학적 틀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코스모테크닉스의 관점에서 영감을 얻어, 그는 사물을 문화 공학의 일부로 보았습니다. 즉 사유, 경험, 심지어 정신적 변화를 활성화하는 도구들이자 다른 존재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문턱으로 여겼습니다.
비도클: 그렇다면 중국 문화에 매료되어 유창하게 중국어를 구사했던 그가 어떻게 일본에 오게 되었을까요?
먼로: 데이비드 키드와 같은 확고한 동양주의자에게 일본은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1950년대 초 뉴욕에서 림보(불확실한) 상태로 지내던 중, 그는 다도 명문가 우라센케의 15대 종장 센 소시쓰를 만납니다. 우라센케는 센노 리큐가 창시한 와비챠 전통의 다도 명문가 세 곳중 하나입니다. 센 소시쓰는 전후 일본의 카리스마 넘치는 문화계 인사 가운데 한 명으로, 전쟁 당시 서구의 적이었던 일본을 진정한 평화 애호적인 현대 국가로 재탄생 시키는데 앞장섰습니다. 이는 점령국인 미국 정부가 기획한 수사학적 업적이었지만, 센 소시쓰는 바로 이 일을 맡아 행한 인물이었습니다.
데이비드는 센을 통해 일본 비자를 받고 고베에 정착했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 그는 아시야에서 옛 별궁이었던 큰 일본식 저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파트너 모리모토 야스요시는 방들을 중국식 접견실로 개조하여, 명나라 시대 높은 평상 가구인 강(炕)과 ‘노란 꽃 배나무’로 만든 제단 탁자를 배치하고, 그 위에는 베이징에서 가져온 아끼는 문인 소장품을 놓아두었습니다. 데이비드는 살롱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박식하고, 유머러스하며, 총명하고, 골초인 그는 1970년, 인근 오사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참석한 건축가 벅민스터 풀러, 독일인 음악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미국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등과 교류하며 사교의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조직한 우익 민병대원들도 차를 마시러 찾아왔습니다. 페르시아 왕족 샤의 조카는 데이비드에게 티베트 불교 미술 컬렉션을 만들어 달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순례 중인 베네딕도회 수도사들은 몇 주씩 머물곤 했고,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배낭여행객들은 해시시 냄새를 풍기며 어슬렁거렸습니다.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도 찾아왔다가 데이비드를 보고 깜짝 놀라 『베이징 이야기』의 영화 판권을 샀는데, 두 사람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보였죠.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들은 누구나 데이비드 키드를 만나러 갔습니다. 손님들은 새벽 두세 시까지 머물렀고, 데이비드는 불빛을 낮추고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이나 포레의 레퀴엠을 들려주곤 했습니다.
데이비드는 종교, 영성, 그리고 형이상학에 매료되었습니다. 그가 수집하고, 가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팔기도 했던 예술품의 상당수는 원래 불교 예배를 위해 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선종과 진언종 스님들과 친분을 맺었고, 아시야에 있는 그의 저택은 망명한 티베트 린포체(생불)들의 안식처였습니다. 그는 오모토를 알게 되면서, 신토는 새로운 절박함으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데이비드 근처에 살았고, 저희 어머니와 데이비드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방과 후에 그의 집에 들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이 티베트 승려복을 입고 헬레나 블라바츠키의 『비경』, 게오르기 구르지예프의 『위대한 사람들과의 만남』 등을 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데이비드는 젊은이들을 사랑했고, 저를 사실상 제자로 받아들여 아껴주었습니다. 그는 제가 아시아와 함께할 운명이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
비도클: 그리고 나서 당신은 미국으로 돌아왔죠.
먼로: 저는 1973년에 코네티컷주로 돌아왔고 자연스럽게 깊은 우울감에 빠졌습니다! 일본을 그리워했지만, 우리는 데이비드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다 1975년경, 데이비드는 스미코의 딸이자 현재 오모토의 영적 지도자인 데구치 나오히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데이비드를 가메오카로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와서 이 시대에 오모토의 국제주의적 사명을 되찾기 위한 길을 보여줄 것이라는 꿈이었죠. 키드 씨, 당신이 우리에게 그 길을 인도해줄겁니다.”
데이비드는 집으로 돌아와, 이번엔 자신도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오모토 일본전통예술학교에 대한 비전을 봅니다. 오모토의 원칙에 따라, 그 학교는 예술가, 학자, 문화 지도자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 통합된 방식으로 일본 예술을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는 데구치 나오히와 함께 종교 간 대화 신학자이자 당시 세인트 존 더 디바인 대성당(성 요한 뉴욕 교구 대성당) 주임사제였던 제임스 파크스 모튼과 협력하여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데이비드는 1976년 여름 첫 수업에 저를 초대—아니, 명령이라고도 할 수 있었죠—했습니다. 그때 저는 일본어, 중국어, 티베트어에 능통한 로즈 장학생이자 이후 평생 친구가 된 알렉스 커를 만났습니다.
세미나는 가메오카 본부에서 삼 주 반 동안 진행됐어요. 학교에는 소박한 기숙사, 반쇼덴, 여러 다실, 노극 무대, 도예 공방, 합기도 도장이 있었습니다. 커리큘럼은 수업, 강의, 야외 활동으로 구성되었죠. 그 수업은 ‘게이코(반복해서 연습하고 익히는 예술 형태)’라고 불렸고, 더 깊은 영적 수련은 ‘슈교(수행)’이라고 일컬어 졌습니다. 이런 용어들은 영적 수행에 관련되는 규율과 헌신을 표현하는 단어로, ‘슈교’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길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일본 문화와 종교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가장 에소테릭한 지성의 보고에 입문한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도클: 왜 하필 전통 예술에 중점을 두었을까요? 이것은 데이비드의 생각이었나요, 아니면 오모토 자체에서 나온 것인가요?
먼로: 둘 다입니다. 데이비드는 현대 음악의 열렬한 팬이었지만 현대 미술은 싫어했습니다. 그는 제가 이 분야에 뛰어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용서하지도 않았죠. 그에게 예술은 삶을 위한 기술이자 변화되어 고양된 의식 상태와 소통하는 기술이었습니다.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의식 그 자체로—어떻게 의식을 탐구하고, 확장하며, 이를 통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LSD를 실험했고, 당시 일본에서 구할 수 있던 히말라야산 대마초를 즐겼고, 헉슬리의 표현처럼 언제나 “지각의 문을 여는”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데이비드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가장 광범위한 인간 경험을 얻기 위해서라 믿었어요.
그는 과거를 현재를 재생하는 자원으로 믿었기에 전통 예술에 집중했습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기에 인본주의가 잔인하게 파괴되는 것을 목격했던 그는, 이념적 세뇌 혹은 전후 일본에 만연했던 서구화, 산업화, 근대화의 맹공 속에서 문화 유산이 말살되는 것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데이비드는 문화 보존주의자였습니다. 문화를 고정된 상태로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가장 창의적인 정신에 연결 짓고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음악가, 과학자, 미래학자, 예술가들이 이러한 전통에 접속하여 새로운 형태의 지식을 촉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게 오모토 학교가 생겨났습니다! 저는 사 년 동안 여름마다 그곳에서 스승님들을 위한 통역과 전 세계에서 온 특별한 사람들이었던 그 제자들을 위한 가이드를 맡았습니다. 오모토 덕분에 저는 전문 노극 공연자가 될 줄 알았고, 교토 다이토쿠지에서 재가 제자로 생활하며 선종에 입문할 뻔했습니다!
비도클: 왜 하지 않았어요?
먼로: 남성 위주로 구축된 일본의 전통 제도에 젊은 외국인 여성으로서 지내는 건 솔직히 좀 힘들었어요! 데이비드는 제가 정신과 유머 감각 모두를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1982년 도쿄 소피아대학(조치대학) 을 졸업한 후, 저는 재팬 소사이어티 갤러리7를 설립한 랜드 카스틸 관장에게 고용되어 뉴욕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때 저는 쿠사마 야요이와 오노 요코처럼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본 전위 예술가들의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제 경력과 학업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저는 언제나 오모토의 가르침이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제 감수성을 형성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도클: 그리고 오니사부로의 예술 작품을 접하게 된 거군요.
먼로: 네. 오모토 곳곳에 오니사부로의 서예, 수묵화, 도자기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은 그가 행한 기적, 보편주의 세계관, 그가 겪었던 박해, 그리고 최고의 영적 행로로서 예술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신념에 관해 할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그를 일본 전후 모더니즘의 넓은 역사 속에서 마땅히 인정받아야 할 급진적인 예술가로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1994년에 기획했던 ⟪1945년 이후의 일본 예술: 하늘을 향한 절규⟫에 참여한 백여 명의 예술가 중에서 오니사부로는 단연코 가장 ‘독보적’ 인물이었습니다. 성직자? 신비주의자? 무법자?
몇 년 전, 저는 콜로라도주 산속 폭포 옆에 다실을 지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다도를 수련하지 못했지만, 오모토에서 내면화했던 다도의 몸짓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교토 다이토쿠지에서 수행할 때, 초심자인 저에게 첫 화두를 주셨던 도쿠젠지의 주지 스님이 ‘쓰텐쿠츠(하늘로 통하는 작은 동굴)’라는 다실 이름을 지어 주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수집품을 모으며, 오니사부로의 찻잔 하나를 갖는 꿈을 계속 꾸었습니다. 기쁘게도 알렉스가 마침내 저를 위해 하나 찾아주었습니다. 상자를 열었을 때, 그가 써놓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했습니다.
오니사부로는 자신의 그릇을 단순히 다도를 위한 도구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신령이 깃든 신토의 성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그릇을 빚으면서 오모토의 기도문 ‘간나가라 다마치 하에마세(惟神霊幸倍坐世 신의 뜻과 함께 하여 더욱 축복받기를)’를 암송했습니다. 우리가 오모토 세미나에서 종종 들었던 말입니다. 각 그릇을 만들 적마다 이 기도문을 천 번이나 읊었다고 합니다.
생애 마지막 무렵, 오니사부로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心力を籠めて 진심을 다해 빚은
造りし楽焼の茶碗に 라쿠다완 안에
魂は永久宿る 한 영혼이 영원히 깃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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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종교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고 적은 필사본을 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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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구치 오니사부로는 일본 무술 합기도를 창시한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영적 스승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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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다완 혹은 차완은 찻잔의 일종으로, 원산지와 형태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교토 문화권의 라쿠 가문에서 기와 만드는 장인이 무광의 검은 다완 양식을 만들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다완이 되었다. 현대에 와서 라쿠다완은 일본 정신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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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코는 어머니의 지위를 물려받아 오모토의 교주, 종교적 스승이 되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장녀인 데구치 나오히가 있고, 이런 식으로 모계로 이어져 내려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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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모토는 두 개의 교단 본부를 가졌다. 아야베는 신성한 기원지로 여겨지며, 가메오카는 행정 또는 실무 본부 역할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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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커와 주고받은 사적인 서신에서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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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카스틸이 1971년 뉴욕에 설립한 재팬 하우스 갤러리로 재팬 소사이어티 빌딩 안에 있었다. ↩
본 저작물은 2025년 10월 발간 예정인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강령: 영혼의 기술』 (서울: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 2025)에 수록될 예정입니다. 본 저작물은 저자의 동의 하에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웹사이트와 e-flux 저널에 선공개됩니다. 글의 저작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와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2025 필자, 저작권자,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