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코믹월드

이연숙(리타)
제1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미디어_시티 서울 2000 《도시: 0과 1사이》 「청소년 디지털 문화제」. 서울시립미술관, 2000. 프로그램 기록 영상 발췌.

본 연구에서 이연숙(리타)는 비엔날레로 표상되는 한국에서 미술의 제도와 하위 문화/하위 주체가 맺어온 관계를 중심으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다양한 장면 속에서 감지되는 분열과 모순을 술회한다.

이연숙. 닉네임 리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들의 존재 양식에 관심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 를 운영한다. 2015 크리틱엠 만화평론 우수상, 2021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시각 문화와 퀴어 부정성을 다루는 책 『진격하는 저급들』(미디어버스, 2023)을 썼다.



연구명 미술관과 코믹월드

분류 에세이

에디션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사전프로그램(프리비엔날레)

저자 이연숙 (리타)
http://blog.naver.com/hotleve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역사)와 하위 문화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자신 있게(!) 수락하고 난 뒤 비엔날레 준비팀이 공유한 자료집과 지난 비엔날레의 영상 자료들, 개인적으로 내가 이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1990년대 대중 문화 연구들, 내가 쓸 글과 관련 있다고 여겨지는 2000년대 대안공간과 2010년대 신생공간을 다룬 길고 짧은 글들을 수개월에 걸쳐 한 번씩은 전부 ‘찍먹’해 본 뒤에 나는 어째서인지 내가 전혀 이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정말이지 전혀 쓸 수가 없었다. 할 말은 있지만 그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심하고 고뇌하게 되는 통상의 ‘작가의 벽(writer’s block)’과는 달리 도무지 어떤 말이 가능할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증상을 앞에 놓고 그 까닭을 자문한 끝에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와 하위 문화는…실은 별 상관이 없는 게 아닐까?

잠깐, 이 글은 물론 ‘그렇지 않(았)다’는 또 다른 결론을 향해 이행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런 결론 앞에서 꽤 오래 멈춰 있었던 건 사실이다. 1996년 처음 열린 기획전 ‘도시와 영상’을 전신 삼아 2000년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미디어_시티 서울’이라는 사업명으로 출발해 2014년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을 거쳐 2019년 현재의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라는 명칭에 이르기까지 약 28년간 격년으로 열린 비엔날레에 대한 접근 가능한 모든 자료를 공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이런 수준의 결론을 내렸다니 아마 읽는 사람으로서는 황당할 것 같다. 앞서 문장에서 최소한 ‘별’이라는 부사에 방점을 찍어 그렇다면 청탁을 받은 네가 ‘겨우’라고 할지라도 둘 사이에 희박하나마 존재하는 ‘상관’을 찾아내면 될 것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옳은 말이다. 먼저 왜 내가 왜 이런 임시 결론을 발판 삼을 수밖에 없는지 설명(변명)하기 위해 하위 문화에 관심이 있는 누구라도 대부분 동의할 수 있을 만한 교과서적인 논의부터 시작해 보자.

범박하게 말해 미술과 하위 문화의 관계는 위계적이고 (피)착취적이다. 문화 이론가 딕 헵디지가 일찌감치 지적한 것처럼 하위 문화가 아무리 주류 규범과 가치에 대한 저항적 의도에서 출발한 이른바 스타일의 운동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 시각적 스타일 때문에 자본의 흐름에 쉽게 포획/포섭되며 구매 가능한 상품의 일종으로 환원된다는 사실은 이제 널리 알려져 있다. 전후 서구 노동 계급 청년들의 하위 문화로부터 추출할 수 있었던 지배 문화에 대한 대항적(counter), 나아가 대안적(alternative) 의미와 가치는 1990년대 소비자본주의의 번성과 함께 “하위 문화는 저항하는가?”라는 필연적인 질문을 낳기도 했다.1 하지만 이런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위 문화 혹은 철학자 질 들뢰즈가 언급한 소수 문화를 정의하는 특징은 정주와 탈주를 반복하는 창조적 운동성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위 문화는 알려진 것처럼 하위 문화적 코드와 라이프 스타일을 공유하는 취향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백화점과 미술관으로 귀결될 제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기꺼이 진창에 처박히기를 택하는 일종의 니체적 의미에서 ‘운명애(Amor Fati)’적인, 그러니까 긍정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혹은 그렇게 봐야‘만’ 한다—특히 디지털 공간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부족주의가 다시금 강세를 보이며 나르시시즘적 취향 전시가 하위 문화적 외피를 두른 채 인스타그램에 범람하고 있는 이런 시점에서는 말이다.

비단 인스타그램 뿐인가. 알다시피 ‘고급’ 문화인 미술은 오래전부터 ‘저급’ 문화인 대중 문화와 하위 문화를 원료 삼아 이를 해체하고 접합하고 가공하는 방식으로 문화적 아방가르드로서 ‘새로움’이라는 자신의 가치를 갱신하는 요컨대 ‘창조 경제’의 원리를 수립해 왔다. 예술 이론가 토마스 크로는 20세기 현대 미술의 역사를 대중 문화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파악하면서 미술이 대중 문화를, 대중 문화가 미술을 상호 참조하며 자기 변형 혹은 창조를 거듭해 왔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 논증한 바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는 유튜브와 K-POP의 인터페이스와 시스템, 대량 생산된 상품과 값비싼 ‘명품’의 시각적 기호와 ‘아우라’를 차용해 작업하는 예술가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새삼스럽지만 이러한 현상은 비판할 일이 아니고 오히려 미술이 어떻게 예술가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현실이라는 물적 토대와 맞닿아 있는지를 포착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는 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생산된 예술은 건조하게 말해 예술사적 위상을 통해 궁극의 ‘대체 불가능한 토큰’, ‘국제 통화(currency)’라는 상징성을 획득할 수도 있다. 대중 문화는 바로 그 상징성을 부인/선망하는 방식으로 의존하며 (오늘날은 사정이 조금 다르지만) 유사-미술적 ‘컨텐츠’를 제작하고 제공한다. 1996년 기획전 제1회 도시와 영상 《1988-2002》에서 서울에 14개 밖에 없었던 전광판을 통해 당시로서는 실험적이던 영상 작업을 송출했을 때 우연히 전광판을 본 많은 보행자 관객들이 기존 송출되던 광고와 작품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지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준다.2

그렇지만 본성상 하위 주체의 예속과 해방의 한계를 표시하는 하위 문화는 미술과 대중 문화가 맺는 어떤 의미에서는 평등한 상호 착취적 피드백 루프라는 관계(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최소한 ‘고급’ 문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하위 문화는 대중 문화와 친연성을 갖지만, 그럼에도 대중 문화가 ‘지배’ 문화라는 점에서 하위 문화는 분리되기 때문이다. 즉 하위 문화는 미술과 대중 문화 모두의 ‘바깥’에 있기를 지향하거나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바깥’으로 추방되어 있다. 특정 약호나 스타일, 규칙이나 상징 체계의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하위 주체의 삶에서 하위 문화가 발명되기 마련이므로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 자체로 하위 문화는 하위 주체의 상상적/실재적 임시 거처다. 다시 말해 하위 주체가 일시적으로 지배 규범과 도덕의 압제로부터 도피하는 피난처인 동시에 당장 사용 가능한 문화적, 언어적 자원의 이질적 접합과 혼용을 통해 기존 사회에서는 가시화된 적 없었던 새로운 존재 양식을 제작하는 실험실과 같은 공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종국에는 주류/지배/소비 문화에 흡수될테고 더욱이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저항 주체로서의 가능성이 아직 낙관적으로 진단되던 하위 주체 또한 이제는 대체로 소비자 주체로 변모해 버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위 문화라는 용어가 유용할 수 있다면 바로 ‘정상’ 사회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들의 끔찍하게도 끈질긴 생명력을 포착할 수 있는 제한적 범주라는 도구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째서 제한적 범주인가 하면 스타일은 삶을 가시화하는 동시에 언표되고 해석되고 재현될 수 있는 대상으로 그 삶을 ‘전락’시킴으로써 되려 비가시화하기 때문이다. 스타일은 보이게 만들면서 그 이상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스타일을 정체성의 직접적 표현이 아니라 매개적 재현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좌) 취미가×워크스, 〈OoH〉, 2021. 미디어캔버스.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하루하루 탈출한다》 유통망 프로그램. 케이팝스퀘어미디어, 2021. 사진: 글림워커픽쳐스 (우) 폴린 부드리 / 레나테 로렌츠, 〈(No) Time〉, 2020. 복합 매체 설치, HD 비디오(컬러, 사운드), 블라인드. 작가 제공.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하루하루 탈출한다》. 서울시립미술관, 2021. 사진: 글림워커픽쳐스

이 지점에서 왜 미술과 하위 문화가 맺는 관계가 (대중 문화와 달리) 근본적으로 위계적이고 (피)착취적일 수 밖에 없는지가 드러난다. 하위 문화적 스타일이 화이트큐브라는 공간으로 진입할 때 그러한 스타일이 배양된 삶 자체는 표백된다. 단지 하나의 삶이 아니다—하위 문화적 스타일은 특정 문화를 공유하는 모든 하위 주체적 삶‘들’이 일종의 지분을 공평하게 갖고 있는 공유지로서 이 경우 표백되는 것은 이들 모두의 삶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 아니 에르노가 말했듯 “제 종족의 배신자”로서, 그리고 철학자 샹탈 자케가 말했듯 “계급 횡단자”로서 한 개인이 화이트큐브에 ‘입성’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결코 하위 주체 전체에 대한 고급/지배 문화로부터의 ‘인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그 개인에 대한 인정일 뿐이다. 이 때문에 하위 문화를 성공적으로 제도권 미술에 ‘수입’한 예술가들은 다름 아닌 ‘제 종족’들에게 가장 혹독한 비난, 비판을 받는다. 또한 그 자신 역시 하위 문화적 스타일을 미술 언어로 ‘번역’해야 하기에 이 과정에서 분열과 모순을 겪을 수밖에 없다. 대문자 ‘미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판돈을 잃게 되어 있는 내기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듯이 하위 문화의 ‘고급’ 문화화(化)는 실은 (전자가 후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가 전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도 미술에서 ‘새로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가능성’은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미술은 하위 문화(만큼이나 하위 주체)의 가능성을 착취하고 착즙한다—그것도 선택적으로 말이다.

…내가 왠지 삐딱하게 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면, 그렇다. 제대로 느꼈다.

기본적으로 나는 하위 문화와 미술이 공생 관계도 적대 관계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위 문화는 미술의 필요에 따라 미술의 형식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자체로는 결코 미술이 될 수 없는, 이를테면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를 따라 말하자면 미술의 “구성적 외부”다. 그렇다면 미술은 미술이기 위해 미술의 경계를 설정하는 미술의 ‘바깥’인 하위 문화에 빚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가능하다. 위계 관계 역시 반(反)관계일지언정 비(非)관계는 아니기에 앞서 (어쩌다 보니 ‘미술 제도’의 표상을 떠맡게 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와 하위 문화가 ‘별 상관 없다’는 언급은 취소해야 할 것 같다. 하위 문화를 문화 전반으로 확장해 생각해 보자면 어쩌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2000년대 이후 태동한 뉴 미디어 문화 자체와도 그런 관계를 맺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무엇이 미술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심사하고 선별하는 미술 행정 기관이자 미술 재생산 시스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수공예적, 로우테크적 성격을 암시하는 키네틱 아트는 한때 무려 예술에 ‘기술’을 접목한 미디어 아트였으며(예술이 이미 기술인데도!),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기반으로 막 실험되던 웹 아트/넷 아트는 이제 노스탤지어마저 불러일으키는 박물학적 ‘유물’이 되었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가진 이 시대에 미디어 아트라는 용어는 더 이상 어떤 경이도 주지 않지만 여전히 어떤 비물질적 대상과 관계를 미술의 범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인가라는 해석과 판단의 문제는 미술 제도의 몫으로 남는다.

이쯤해서 나 역시 굳이 이 아까운 지면에서 안 해도 될 볼멘소리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은데 그 이유는 내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문화적인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90년에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 김해에서 자라 2009년에 서울로 ‘상경’한 뒤로 단 한 순간도 내 주변에 볼 게 없다고 느낄 새가 없이 살아왔다. 이는 먼저 1990년대 중후반 ‘세계화’를 위시한 국가 문화 지원 정책과 도시 관광 산업을 목적에 둔 대형 문화 행사—대표적으로는 1993년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전,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1995년 광주비엔날레,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현재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로 이어지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의 도시와 영상—가 다져 놓은 한국 문화 예술계의 문화적/제도적/물질적 인프라 덕분(혹은 때문)이다. 이런 인프라는 오늘날에는 미술 생태계를 이루는 환경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이 시기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중(대)형 미술관들—1995년 아트선재센터, 1996년 일민미술관, 1998년 부산시립미술관—이 개관했고, 1998년 쌈지스페이스를 중심에 둔 1세대 대안 공간들 또한 출현했다. 현재 대안 공간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중반을 아우르는 시대/세대의 상징으로만 남은 것처럼 보이지만 2010년대 새롭게 등장한 신생 공간의 정체성 규정은 물론이고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 인식에도 여전히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니 서울시립미술관장을 역임하기도 한 기획자 김홍희가 “1990년대는 아직도 살아 있다”3고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까지 하다. 더구나 개인적 욕망에 의해서건, 대의적 책임에 의해서건 미술계 안팎의 다양한 행위자들은 ‘최초’라는 부담감을 안고 무에서 유를 구축해야 했을 것이다.

(좌) 김상돈, 〈바다도 없이〉, 2018. 설치, 혼합 매체. 가변 크기.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좋은 삶》. 서울시립미술관, 2018. 사진: 스튜디오 수직수평(유우지+홍철기) (우) 정은영,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2014. 퍼포먼스. 45분.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 《귀신 간첩 할머니》 개막식 퍼포먼스. 서울시립미술관, 2014

앞서 나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런 내게 주어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거쳐온 28년 간의 변모 과정을 기록을 통해 읽고 소화하는 과업은 미술계의 일원으로서도, 학부생이던 시절부터 매해 빼놓지 않고 관람하던 관객으로서도 그 ‘빚’을 청산할 기회였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를 맨 처음 관람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박찬경 작가가 감독한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4 《귀신 간첩 할머니》에서였다. 미술대학 동양화과에서 인문대학 미학과로 학적을 ‘세탁’한지 만 2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난 그런 식으로 캡션마저 먹어 치울 듯이 열심히 몇 번이나 같은 전시를 보는 경험을 두 번 다시는 하지 못했다. 몇 년 뒤에는 친구들과 지인들이 하나둘씩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작가로 참여하기 시작하며 예전보다는 문턱이 낮아진 듯 친근한(?) 감정마저 들긴 했지만 그럼에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여전히 젊고, 새롭고, 심지어 명예로운 미술계의 등용문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마치 새삼스러울 것 없는 격년 주기 관행처럼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구태여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이런 추억까지 꺼내 들게 된 이유는 내가 이번 청탁에 정말이지 ‘나’라는 주어를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나’를 빼고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던 까닭은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에도, ‘미디어’에도, ‘시티’에도, ‘비엔날레’에도 ‘분열과 모순’을 느낄 수밖에 없는 ‘농어촌 출신’의 ‘퀴어’이자 ‘오타쿠’이기 때문이다. 미술은 늘 내가 속해 있었던 또 다른 세계인 레즈비언 업소와 동인지 판매전의 냄새를 완전히 탈취하는 조건으로 내게 간신히 입장을 허락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위 문화 ‘출신’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한동안 나는 내가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만화가를 지망했었다는 사실을 특히 ‘성골’ 미술/미학 전공자들 앞에서 숨기기도 했다.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이 주최하는 SeMA-하나 평론상을 통해 정식으로 미술 평론가로 ‘등단’한 뒤에도 여전히 나는 미술이라는 ‘고급’ 문화와 모종의 긴장 관계 속에 있다고 느낀다. 1990년대 이후 대학이라는 계급 재생산 기구를 통해 각양각색의 출신 성분을 가진 미술 전공자들이 (과잉) 생산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나와 같이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기에 미술을 시각 예술과 문화의 한 ‘장르’로 격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장르 간 위계는 존재한다. 문학 평론가 김영찬의 말처럼 1990년대를 (요컨대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으로 상징되는 과거와 2000년대의 아직 오지 않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미래 사이에서의) “타협 형성의 시기”4로, 그리고 미술 평론가 문혜진의 말처럼 서구 이론에 대한 “번역”5과 “자체적인 형질 전환”6의 시기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당시 폭발적으로 생성되던 한국 미술계의 인프라 역시 모종의 타협과 번역을 거쳐 현재까지 지속되는 ‘장르 간 위계’를 생산했으리라는 임시적인 가설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위계는 앞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무엇을 미술에 포함하고 또한 무엇을 미술로 포함하지 않을지에 대한 매 순간의 의사 결정이 느슨하게 축적된 결과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과에 이르는 과정 자체는 각 개인의 선택을 넘어서는 ‘제도’라는 기관(agency)를 작동시키는 기계적 의지를 통해 설명될 수 있기에 어떤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각 장르 간 위계가 행위자 네트워크를 통해 ‘구성’되며 ‘재현’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보이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미술과 하위 문화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제 ‘근본’인 하위 문화에 대해 필요 이상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 글에서는 미처 풀어내기 어려운 또 다른 과업이겠지만, 미술 앞에서 느끼는 ‘분열과 모순’이라는 사적 콤플렉스는 미술의 자기 보존 원리인 장르 간 위계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역사화될 필요가 있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역사는 물론이고 미술의 역사 전체를 하위 문화에 대한 착취(!)와 분리의 역사로, 또한 하위 문화와 ‘고급’ 문화 사이 주체의 ‘분열과 모순’의 역사로 보자는 내 제안은 누군가에게는 그럴싸한 문제 제기처럼 들릴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제 좌표를 망각한 부적절한 아군 사격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촉매가 2000년 제1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미디어_시티 서울 2000 《도시: 0과 1사이》의 부대 행사였던 〈디지털 청소년 문화제〉의 영상 속 코스프레 쇼라는 것이다.7 방대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아카이브에서 어쩌다 먼저 고르게 된 이 영상에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희한하게도 2000년대 부산 코믹월드, 약칭 ‘부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코스프레 경연 대회의 잃어버린 녹화 영상,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진 적이 없으니 잃어버릴 수도 없었던 그런 녹화 영상이 엉뚱한(?) 곳에서 마침내 발견된 것 같다는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종종 이런 식으로 ‘음지’의 존재는 ‘양지’의 양식을 빌려 출현한다.

〈디지털 청소년 문화제〉는 조선일보와 서울시가 공동 주최한 행사로 코스프레 쇼뿐만 아니라 당시 ‘건전한’ 청소년 문화로 떠오르던 게임, 영상, 음악과 같은 여러 분야의 ‘아마추어 문화 전사’8를 육성하고 고무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되었다. 그러므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역사를 대표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이 애매한 위상의 연계 부대 행사는 당시 비엔날레는 물론이고 미술관도 마찬가지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공공’으로, 미술로, 미디어로, 문화로 봐야 할지 몰랐던 시기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반증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2000년은 코스프레 쇼와 백남준이 ‘비엔날레’라는 이름 아래 공존할 수 있었던 기묘한 시기였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현재 진행형’으로서 1990년대를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는데 왜냐하면 1998년 일본문화개방 이후 ACA(아카)와 같은 기존 국내 아마추어 만화 동인 행사와 별도로 1999년 일본 기업이 운영하는 코믹월드가 처음 서울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국내 ‘오타쿠’, 혹은 ‘마니아’의 역사는 물론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최소한 ‘동인녀(야오녀)’, ‘코스어(코스플레이어)’, ‘오덕후(오타쿠)’과 같은 하위 문화적 정체성이 이른바 ‘민주화’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나 역시 2000년대 초반 부산 코믹월드의 개최 횟수가 아직 한 자릿수이던 시기부터 부산 지하철 2호선 벡스코역과 센텀시티역 사이에 위치한 벡스코(BEXCO) 컨벤션 센터를 계절마다 드나들던 아마추어 창작자, ‘동인녀’였다. 부산 코믹월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건너 편에 위치한 부산시립미술관이 보였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곳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지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위치해 있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완전히 분할된 두 세계였던 셈이다.

이 분할된 두 세계의 풍경은 〈디지털 청소년 문화제〉의 영상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화면 속 앳된 얼굴 진행자는 능숙한 서울 사투리를 구사하며 무스탕 재질처럼 보이는 두터운 옷을 껴입고 있다. 〈디지털 청소년 문화제〉는 9월에 진행되었다는데 예상치 못하게도 기후 위기를 실감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진행자가 아마도 코스튬을 점검하느라 늦어지고 있을 코스플레이어들을 기다리며 객석을 향해 이런저런 잡담(혹은 혼잣말?)을 던지는 걸 보니 이런 행사가 아마도 처음은 아닐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마침내 ‘바람의 점심’이라는 팀명으로 호명되어 등장한 코스플레이어들은 만화 「바람의 검심」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복장을 하고 해당 작품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결투 장면을 몸소 재연해 보인다. 코스플레이어들은 쌍을 이뤄 「바람의 검심」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리믹스 음악을 배경에 깔고—아마도 음원을 구하기 쉽지 않았거나 아직까지는 공공 장소에서 ‘일음’을 틀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사진을 찍기 좋도록 각 등장 인물들의 성격을 나타낼 수 있을 포즈를 취한다. 여러 팀들이 연이어 호명되어 무대에 올라오고 마찬가지로 코스플레이어인 관객들 역시 화면에 등장한다. 그 배경으로 서울시립미술관 부지였던 경희궁 근처, 서소문본관이 개관하기 전 서울시립미술관의 사무실로 사용했던 서울고등학교가 보인다. 비엔날레야 어찌되든 삼삼오오 모인 ‘청소년’ 코스튬플레이어들은 마냥 즐거워 보인다. 아마도 이들은 어디에서나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도 교환될 수도, 승화될 수도 없는 이들의 즐거움을 보존하기 위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아카이브의 일부를 ‘단지’ 하위 문화에 불과한 것으로 표시해 두기로 했다. 이것이 이처럼 긴 푸닥거리가 필요했던 이유다.


  1. 이동연 편저, 『하위문화는 저항하는가?』(문화과학사, 1998). 

  2. “Q: “아트비전 시티비전”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요? A: 지금도 『한겨레』에서 활동하시는 노형석 기자가 막 미술기자로 일을 시작할 때인데, 그분이 이 프로젝트에 큰 흥미를 보였어요. 함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옥 전광판을 보려고 광화문 사거리에 나가서, 노형석 씨가 행인들에게 무작위로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더군요. 전광판에서 노상 보여주는 광고와 다르지 않게 여겼어요. 아니, 그저 색다른 광고처럼 여겼지, 이게 ‘작품이구나’ 하면서 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권진, 「이섭과의 대화, 미디어아트 = 공공성」,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1996-2022 보고서』 (서울시립미술관, 2002), 47. 

  3. 심지언, 「김홍희 & 윤난지의 허스토리(Herstory)」, 『월간미술』 2024년 12월, 51. 

  4. 김영찬, 「’90년대’는 없다 - 하나의 시론試論, ‘1990년대’를 읽는 코드」, 『1990년대의 증상들』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편저 (계명대학교출판부, 2017), 15. 

  5. 문혜진, 『90년대 한국 미술과 포스트모더니즘: 동시대 미술의 기원을 찾아서』 (현실문화, 2015), 14. 

  6. 같은 책, 301. 

  7.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Seoul Mediacity Biennale 유튜브 채널, “SMB01 〈청소년 디지털 문화제〉 Digital Culture Festival for Adolescents”, 게시일: 2024년 7월 4일, 마지막 열람일: 2024년 12월 20일, https://www.youtube.com/watch?v=Vc5eK90Bhvg&t=255s 

  8. “[사고] 2000 청소년 디지털 문화제”, 조선일보, 최종 입력일: 2000년 10월 13일,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0/10/13/200010137013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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