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아시아

본 인터뷰는 다양한 위치에서 비엔날레를 경험한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자문위원과의 대화이다. 2022년 보고서에 출판된 글을 2024년 관련 이미지를 더해 재편집하였다.
김홍희는 제4대 서울시립미술관장(2012-2017)을 지냈으며, 미디어 시티_서울 2000의 기획자문위원, 제1회 도시와 영상 (1996) 운영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지난 40여년간 미디어아트와 페미니즘 미술에 깊은 애정을 기반으로,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 큐레이터로서 활발한 연구와 활동을 전개해왔다. 1998년 대안공간 쌈지 스페이스를 설립하였고,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06년 제6회 광주비엔날레 《열풍변주곡》 예술감독, 2006년부터 2010년까지 경기도미술관 관장을 역임하였다.
SMB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으로 계시면서 ‘기획하는 미술관’을 추구하셨고, 같은 시기 비엔날레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미디어_시티 서울 2000에서 기획자문위원으로 참여하시며 경험하셨던 이야기부터 듣고 싶습니다.
김홍희 되돌아보면 대단한 출발점이었어요.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으며 개최한 최초의 문화행사이자 아트 축제로, 서울과 세계를 잇는 ‘미디어시티’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추진되었죠. 미디어를 화두로 네트워크의 구심점이자 매개로서 서울이 갖는 의미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망하고, 미술의 잠재력을 미디어로 보여주려는 점에서 참신함이 돋보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전시 이외 행사가 다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트라이앵글 워크숍’이 가장 흥미로웠던 것으로 기억해요. 예술, 과학, 산업, 그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삼각관계. 그래서 ‘트라이앵글’이었는데, 그 당시만 해도 멀티미디어 산업계에서 예술과 디자인 쪽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이 시급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단순히 기술만 있기보다는 새로운 문화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낸다는 차원에서 예술가들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있어야 했지요. 한편으로 예술가들은 기술적 지원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이었어요. 그 당시 저도 기획자로서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삼성 등 기업이나 카이스트 같은 학교에서 운영하는 연구실을 쓸 수 있을지 곁에서 알아보기도 했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트라이앵글 워크숍’은 작가들을 기술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어내는 워크숍이었죠. 그래서 상당히 고무적이었고. 실제로 어떤 결실을 만들었다기보다는 보다는 그런 식의 논의가 촉발된 것 자체가 유의미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서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거죠.
SMB 2000년에는 기획자문위원만 26명이 초대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직도만 봐도 첫 행사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김홍희 행사의 범위가 1회치고 상당히 컸어요. 어린이를 위한 인터렉티브 프로그램인 ‘디지털 앨리스’, 백남준, 매튜 바니, 브루스 나우만 등 동시대 국제적인 작가들을 소개한 ‘이스케이프’, 그리고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의 전광판 프로젝트 ‘시티 비전/클립 시티’는 서울에 있는 전광판에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짧게 편집해서 보여주는 방식을 선보였죠. 비싼 전광판을 이렇게 쓴다고 혼도 좀 나고 그랬어요. 그때는 미디어아트에 대한 인식이 좀 부족했을 때니까 그런 반응이 있을 수 있었죠. ‘지하철 프로젝트 - 퍼블릭 퍼니쳐’는 서울시내 13개 역사에서 진행했었죠. 이 모든 것이 전 방위적으로 포진 가능했던 건 예산도 컸기 때문이에요. 고건 시장님 시기인데, 행사를 전면적으로 후원해주셨죠. 그리고 강홍빈 부시장 역시 문화 쪽에 상당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계셨어요. 송미숙 총감독이 충분한 예산과 인력을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어요.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고. 서울에서 국제적인 행사를 조직하다 보니, 가능한 인력과 예산이 총동원되었는데, 2회부터는 규모가 확연하게 줄어들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시의 관심이 줄었기 때문이겠지만, 왜 시가 행사를 축소했는지를 미술계가 생각해봐야 하겠죠.
SMB 1회에서 2회로 넘어오며 예산이 10분의 1로 줄어들었습니다. 첫 행사를 조직할 때만 해도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얘기들을 나누셨던 것 같아요. ‘비엔날레’ 형식으로 치른다는 결정뿐만 아니라, 예술, 기술, 그리고 산업의 장기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지향점도 분명했고요.
김홍희 맞아요. 2회 비엔날레를 치를 장소까지 거창하게 지정해놨는데 그게 다 이루어지지 않았던 거죠.
SMB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정책의 변화로 인한 영향이 있었던 걸까요?
김홍희 그런 것도 있겠죠. 또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있잖아요.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단번에 성과를 올리려다 보니 일종의 부작용도 있었던 것 같아요. 여하튼 예산이 급격하게 줄어든 것을 보면 시에서 ‘예산 대비 효과가 무엇이냐’는 질문들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SMB 1990년대 초반부터 ‘뉴미디어’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변화하는 동시대성을 주목하며 국내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1996년 제1회 도시와 영상 운영위원으로서 선생님의 역할이 있었을 것 같고요. 제목만으로도 분명한 발언이 있잖아요. 변화하는 미디어와 도시환경을 주목하는 여러 행사에 지속적으로 관여해 오셨습니다. 시대적인 비전을 공유하고, 행사를 함께 도모하는 동료들이나 원동력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홍희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으로 넘어가면서 광주비엔날레, 미디어_시티 서울, 부산비엔날레 등이 차례로 생겨나고, 한국의 ‘미술씬’이 급격하게 국제화를 맞게 됩니다. 미술계에서 진취적인 사고를 했던 큐레이터들이나 작가들이 큰 포부와 기대를 하고 함께 대열에 참여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돌이켜 봤을 때 아쉬운 점은 개개인의 열정을 끌어 모으는 중심적인 힘이 없었던 것 같아요. 왜냐면 정부차원의 문화예술 정책이나 전략이 세워져서 단계적으로 진입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개인들의 에너지가 그냥 산발적으로 뻗어있었다고 할까요. 의식을 가진 개인들이 있었지만, 모두를 하나의 집약된 에너지로 발전시킬 정부의 지원이나 정책이 부족했죠. 시대적인 한계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의 꼭짓점에 항상 백남준 선생이 계셨습니다. 백 선생님은 예술가로서 많은 행사와 조직에 관여하시면서 영감을 주셨고, 저를 포함한 여러 큐레이터에게 일할 기회를 주셨죠. 그뿐만 아니라 작가도 많이 지원 하셨어요. 그래서 전 항상 백 선생님이 나라에서 못한 일을 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해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이 만들어지고 광주비엔날레가 출범한 것도 백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그 시기에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을 돌이켜보면 한국은 백남준한테 빚진 게 많다고 생각해요.

SMB 관장님 재임시절로 넘어가 이야기해볼게요. 2012년 관장으로 취임하시면서 미술관에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습니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역시 설정하신 미술관의 방향성 안에서의 역할이 있었을 텐데요. SeMA-하나 아트상도 2014년에 제정 되었구요.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어요?
김홍희 저는 미술관에서 일하기 전 경기도미술관 재임시절부터 미술관 경영철학으로 ‘포스트뮤지엄’을 주창하고 실천했습니다. 경기도미술관 같은 경우 제가 초대 관장이었기 때문에 ‘포스트뮤지엄’을 실천하기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많은 시간과 아이디어가 필요했어요. 그나마 그때 할 수 있었던 일이 경기창작센터에 레지던시를 만들어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죠.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버려졌던 폐교를 레지던시로 전환해서 한국 작가들만이 아닌 외국 작가들도 초대하고, 새로운 미술관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와서 보니 여기에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도 있고 비엔날레도 있는 거죠. 비엔날레나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미술관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 미래적인 방향을 만들 수 있는, 그러니까 ‘포스트뮤지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견인차예요. 전 미술관이 케케묵은 관행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안적인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전 쌈지아트스페이스와 같은 대안공간, 그리고 광주비엔날레나 베니스비엔날레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일의 경험을 쌓아왔어요. 독립군을 자처한 거죠. 전방에서 기술을 쌓았다고 말할 수 있고요. 그런 ‘독립군 정신’이 미술관을 진취적인 방향으로 개혁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미술관을 ‘포스트뮤지엄’, 즉 21세기형 미래 미술관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비엔날레를 미술관 직영으로 전환했어요. 물론 그전에도 미술관 산하에 있었지만, 미술관과의 연결성이 희미한 일종의 위성 부서로 매회 실무자가 바뀌며 꾸려졌거든요. 비엔날레가 미술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충분한 서포트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광주비엔날레를 경험하면서 알게 된 조직을 참고로 작은 규모나마 효율적이고 지속성 있는 미술관의 직영 체제의 비엔날레 조직을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공식 명칭을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로 바꾸고 예술감독과 비엔날레팀이 충분한 행정지원을 받을 수 있게 총무과 담당 직원을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관내 학예사를 기획업무에 참여시켜 비엔날레 업무를 익히게 하는 등 명실상부한 미술관 비엔날레로 체계와 내용을 갖추고자 했죠. 조직 개편 이후 2014년에는 박찬경 예술감독, 2016년에는 백지숙 예술감독이 위촉되었습니다. 5년의 관장 임기 동안 제가 직접적으로 관여한 두 번의 비엔날레는 제가 생각했던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결연관계, 직영 관계를 통해서 포스트뮤지엄 비전을 실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SMB 8회와 9회 비엔날레에서 만들었던 ‘대안적’인 시도가 결과를 중심으로 보면 변화나 혁신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막상 새로움을 시도하던 시점에서는 위험천만한 결정처럼 여겨질 수 있지 않나요. 남들이 보거나 생각하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는 거니까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미 쌈지아트스페이스와 광주비엔날레 등 독립큐레이터 활동을 통해 앞서 경험하신 바가 있으셨기에 예술감독의 결정에 대한 신뢰나 이해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미술관 관장과 비엔날레 예술감독 간의 관계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홍희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관계에서 관장의 역할은 예술감독이 일을 충분히 잘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겁니다. 전 관장 재임 당시 예술감독들이 원하는 부분에 대한 지원, 그리고 문제에 대한 조정과 해결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2006년 6회 광주비엔날레 《열풍변주곡》에서 예술감독으로 경험이 있었기에 고충을 이해하고 충분한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 다른 지점은, 미술관의 비엔날레 전담 학예사가 되도록 바뀌지 않고 연속성을 가져 노하우가 축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엔날레를 서포트하는 미술관 조직과 체계를 바탕으로 관내 인력, 특히 학예사와 협력이 원활해야 매번 바뀌는 예술감독이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SMB 미술관 직영 비엔날레의 모델로서 호주의 아시아퍼시픽트리엔날레(APT)를 언급하신 적이 있으세요. 이 트리엔날레의 어떤 특징들을 주목하셨나요?
김홍희 APT는 베니스비엔날레나 도큐멘타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독특한 운영 성격을 가집니다.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아시아 지역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에요. 물론 그 범주에 미국이나 유럽에서 활동하는 아시아 출신 작가들도 포함되지요. 이런 방향성이 호주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최대한 반영하기에 다른 비엔날레와 다른 차별성과 정체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호주의 문화예술 정책에서 원주민 미술을 보호하고 육성시키는 배경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APT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첨단미술과 원주민 미술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점에서 비서구 비엔날레가 본받을 만합니다. 한국의 광주비엔날레, 중국의 상하이비엔날레, 대만의 타이베이비엔날레, 일본의 요코하마비엔날레 등 여러 서구중심적인 아시아비엔날레와 대조가 됩니다.
두 번째 주목할 점은 APT는 브리즈번의 현대미술관 퀸즐랜드아트갤러리가 직영합니다. APT 초기의 발전 단계에서는 조직 체가 안정화를 이룰 때까지 퀸즐랜드아트갤러리 관장이 감독 역할을 맡았어요. 그리고 조직 내에 비엔날레팀을 운영하는 행정 전문 ‘오피서’가 있어요. 이 ‘오피서’는 초청 큐레이터와 같은 비중으로 비엔날레 주제를 설정하는 일에 동참하며 상당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오피서’로 있던 분들이 지금은 다른 기관의 관장으로 부임하는 등 미술 전문 인력으로 성장하더라고요. 이런 지점들은 미술관이 직접 비엔날레를 운영하면서 취할 수 있는 이점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중요한 지점은 미술관 소장품입니다. 비엔날레는 작가들이 일회적이고 일시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대부분 방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이 생기죠. 퀸즐랜드아트갤러리는 그걸 다 소장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죠. 일종의 ‘임장(현장상황에 따른 대처) 컬렉션’이죠. 그럴 뿐만 아니라 작가들에게 기증받거나 저렴하게 사들이면서 방대한 비엔날레 소장품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광주비엔날레도 광주시립미술관 직영이나 결속체제로 운영됐더라면 비엔날레 소장품도 풍부해지고 국제적인 위상도 상승했을 거로 생각해요. 제가 미술관에 있을 때 비엔날레 작가들이 회수하지 않는 작품을 미술관의 상황에 맞게 수집하기 위한 설득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 기대치에는 못 미쳤지만요.
SMB 8회와 9회 비엔날레 작품들이 비교적 많이 미술관 소장품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018년 SeMA-하나 미디어 아트상을 수상한 안건형 작가는 수상작을 기증한 사례도 있고요. 백남준 선생님의 〈시장〉(2000) 역시 미술관 소장품입니다.
김홍희 사실 소장품이 물질적인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카이브이기 때문에 비엔날레가 끝나고 작품을 소장한다는 것은 기록으로서 성격과 목적이 분명하지요. 앞으로도 미술관에서 이 지점을 유념하고 일궈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SMB 이 인터뷰가 수록되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1996-2022 보고서』도 비엔날레의 인적자원을 주목하고, 그들의 지난 경험을 토대로 정리한 기록을 전문적인 논의를 위한 토대로 전환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홍희 저 역시 동감하고, 그래서 인터뷰를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SMB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지속되어야한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렇다면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홍희 당연히 지속되어야 하고요. 이유를 설명하자면 첫째는 비엔날레의 대안성과 변화를 이끌 추동력 때문입니다. ‘미술계’라는 생태계에서 비엔날레의 중요성은 정체된 미술계의 분위기나 새로운 담론을 이끌 수 있는 장치가 됩니다. 비엔날레가 국제적이고 유명한 큐레이터들의 먹이사슬이라는 식의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한편 미술관에서 수용할 수 없는 일시적인 작품, 프로젝트, 그리고 마이너리티 미학을 시도할 수 있는 것 역시 비엔날레에요. 《귀신 간첩 할머니》는 ‘아시아성’을 주목했지요. 아시아를 은유하고 의인화하여 소외된 사람들을 표상하는 동시에 새로운 물결이나 시대적 전망을 예고하여 전복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메시지를 전달했죠. 전 그 주제가 참 와 닿았습니다. 우리 삶 속에 있는 억압적 요소를 들춰내면서 아시아라는 주제를 대중적으로 각인시켰죠. 그리고 개막식에서 비엔날레 주제와 관련하여 실제 굿을 미술관에서 시연하여 수많은 관객의 참여를 이끌었고요. ‘포스트뮤지엄’의 또 다른 핵심은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고 보이지 않는 관객을 가시화시키는 대중화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는 소수자, 장애인, 사회 교육, 환경문제 등 첨예한 시의적 주제를 다룬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 비엔날레는 아시아성의 대중화에 방점을 찍었고, 다른 하나는 개념적으로 타자에 관한 화두를 던져서 비엔날레의 대안적 기능을 이뤄냈습니다. 저는 단지 저의 재임 시절에 개최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두 비엔날레의 성과 자체를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 비엔날레는 동아시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류를 지리적이고 문화적으로 확산시키는 장치가 될 수 있습니다. 비엔날레를 통한 ‘K-미술’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는 거죠. 새로운 문화 정체성을 갈구하는 동아시아 신세대들에게 어필한 한류와 한류로 대변되는 문화적 혼성, 즉 한국성과 서구성이 절묘하게 결합한 현대 아시아성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와 같은 동아시아 비엔날레가 미술 한류의 순기능적 사이트로 기능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비엔날레는 큐레이터, 평론가, 코디네이터 등 작가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인력 지원의 플랫폼이 될 수 있습니다. 주요 국제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성공적인 비엔날레를 치를 수 있는 역량 있는 기획자가 조속히 배출되어야 한국미술이 국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어떤 훌륭한 작가도 그를 국제무대에 소개하고 평가받게 할 인물 없이는 홀로 역량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국제적인 큐레이터가 국제적인 커넥션을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존속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사성입니다. 비엔날레는 새로운 밀레니엄과 더불어 미디어_시티 서울 2000 출범부터 서울의 역사와 도시구조와의 긴밀한 관련성 등을 고려하며 도시 특정적 행사로 시작했고 그동안 서울을 국제도시로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과학기술과 미디어 발전을 기반으로 한 문화예술과 더불어 도시 외양을 바꾸고 시민들의 상상력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서울의 필수적인 문화 동반자입니다.
SMB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문화예술을 경험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향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하여 의견 부탁드립니다.
김홍희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것과 영합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화두를 던져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자극을 주는 대안적인 조직이자 예술로서 기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임무를 수행하고 강조한 연속성 속에서 미술 생태계를 변화시킬 책임을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적인 차원에서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4차 산업과 관련한 미술 언어를 개발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블록체인, 인공지능, 가상현실, 로봇, 빅데이터에 대한 기술적인 정보나 이해와 더불어, 위로, 힐링, 도덕적 가치, 공공성의 방향을 제시하는 ‘비대면 마케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산업, 기술, 과학과는 다른 미술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미술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풍요로워지고, 인류애적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미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예술이 사라지지 않을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터뷰 일자: 2022년 2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