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 = 공공성

본 인터뷰는 이섭 기획자와의 공공예술과 비엔날레에 관한 대화이다. 2022년 보고서에 출판된 글을 2024년 관련이미지를 더해 재편집하였다.
이섭은 제1회 도시와 영상 《1988-2002》의 큐레이터이다. 1984년 첫 개인전 《이섭작품전》을 개최한 이후, 나무화랑, 아트컨설팅서울(ACS), 일주아트하우스를 거치며 전시기획자로 활동하였다. 궁극적으로 모든 미술의 지향점으로서 ‘공공미술’의 제도화를 고민하며, 미술과 사회, 미술과 일상이 연결되는 사유와 관련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미술평론가이자 시인 최민의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편찬된 『글, 최민』(열화당, 2022)과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개관전 《명랑 학문, 유쾌한 지식, 즐거운 앎》(2023)에 연구자이자 기획자로 참여하였다.
SMB 안녕하세요. 오늘 이렇게 시간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11회를 맞이했습니다. 저희는 2000년 미디어_시티 서울로 시작하기 전 1996년부터 세 번 개최된 도시와 영상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원형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전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적습니다. 제1회 도시와 영상에 어떻게 참여하셨고 그 계기가 무엇인지 먼저 설명 부탁드려요.
이섭 저 역시 보관하는 자료가 거의 없어 현재 기억에만 근거해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김홍희 선생님을 통해 서울시에서 도시와 영상이라는 전시가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일종의 지명 공모로 참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현대의 도시와 영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방향으로 진행하고 싶다는 틀이 어느 정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김진하,이섭)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내용들을 제안해 드렸고, 저희 의견이 상당 부분 수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SMB 그러한 틀을 사전에 정한 주체가 미술관일까요, 아니면 운영위원회(김홍희, 박현기, 안상수, 강준혁, 조덕현)일까요?
이섭 네. 저는 위원회로 기억하고 있어요. ‘도시’와 ‘영상’이라는 두 개념을 묶은 것은 위원회 쪽 생각이고, 저희는 두 개념을 현실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실천적 아이디어를 정리한 셈이죠.
SMB 말씀하시는 실천의 주체가 아트프로젝트서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존재하나요?
이섭 초창기에는 회사명을 아트프로젝트서울이라고 부르다가 아트컨설팅서울로 바꿨습니다. 준비는 1996년 즈음부터 했는데, 실질적인 운영은 1997년 여름부터 시작했어요. 제1회 도시와 영상 《1988-2002》이 저희의 첫 수주사업이었고요. 2010년 12월에 폐업 신고를 했습니다.
SMB 어떤 목적이나 지향점을 가진 회사였나요?
이섭 공공미술. 저희는 이것을 공공예술이라고 불렀습니다. ‘퍼블릭 아트’에서 ‘아트’를 미술로 한정해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당시 김진하 씨와 함께 나무화랑/나무기획을 운영했었어요. 《1988-2002》의 공동기획자 이주헌 씨는 『한겨레』 미술기자를 하다가 그만두고 나와서 잠시 문필가로 지내다가 학고재에 막 합류했었고. 또 다른 공동기획자 박삼철 씨가 『스포츠 조선』에서 미술기자로 일할 때입니다.
당시에 저는 김진하 씨와 함께 관련한 ‘퍼블릭 아트’라는 개념을 알며 연구를 하던때에요. 『아트 인 아메리카』 같은 외국 서적과 잡지를 통해서 글로벌 미술계 흐름을 어떻게 우리하고 맞춰낼 수 있는지를 고민했었죠. 박삼철, 이주헌 씨가 연구에 동참하였고, 우리는 미술이 궁극적으로 나아갈 방향이 공공예술이라는 생각에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미술인들이 ‘포스트모던’ 흐름을 타면서 미술관이나 화랑을 ‘화이트큐브’ 로만 평가 절하하는 분위기도 있었고요. 지금은 다 공감하는 이야기죠. 지나치게 전문지식만을 추구하는 미술의 한계는 뻔하다. 작가에게 도움이 안 되고, 잠재적 향유 주체나 관객을 장벽에 가두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장벽을 뚫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고상한 취미활동 정도로 여기는 컬렉션 분위기… 이런 것들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아예 공공예술을 지향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도시와 영상 제안이 왔을 때 전혀 부담이 없었어요.
SMB 네, 그렇다면 도심전광판에서 작품을 보여준다는 생각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발상이었겠네요.
이섭 당연히. 우리는 그런 생각을 현실화하는데 중심이 있던 반면, 위원회 쪽에서는 여전히 화이트 큐브 형태의 전시를 강력하게 필요로 했고요. 어차피 저희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 모든 것을 저희 책임으로 진행하겠다고 했죠. 지명공모라는 방식이 협상을 통해 이뤄지는 거니 저희 내부에서도 위원회 의견을 어느 정도 수용했고요.
SMB 작가 선정에서는 어떤 방향성이 있었나요?
이섭 당시는 영상을 다룰 수 있는 작가들이 공공성을 염두에 둔 작품을 만들지 않을 때에요. 지금도 대부분 그렇다는 사실이 아쉽습니다. 영상이 미술의 장르처럼만 정립되다 보니 공공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생겼어요. 당시 저희는 그 부분을 매우 심각하게 여겼고, 그래서 보여주는 방식을 여러 가지로 시도해보자고 생각했죠. 그러니까 저희도 기술적인 측면으로 접근을 한 거죠.
SMB 아트컨설팅서울이 지향하던 공공성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섭 그 주제는 이 인터뷰만으로는 충분히 설명이 안 되겠지만, 간략히 말해 당시 저희는 예술 행위와 일상 행위가 괴리되지 않는 어떤 지점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약 10년 넘게 아트컨설팅서울의 활동과 작업은 계속 그 방향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SMB 1990년대 중반은 영상을 포함한 새로운 매체에 대한 실험이 미술계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던 시기입니다. 작가 선정과 작품 구성에 관련한 또 다른 기억이 있다면요?
이섭 저희가 생각했던 미디어아트의 공공성을 실현한 사례로 생각나는 분은 홍순철 작가에요.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영상원 교수로 계셨고, 그 전에는 방송국 PD로도 활동하셨죠. 홍순철 작가와의 작업이 굉장히 의미 있었어요. 변기에 물 내려가는 장면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구 서울600년기념관)에서 보여줬고, 도심전광판에 들어가는 작품은 별도로 구성했습니다.
SMB 도심전광판에서 작품을 보여주는 프로젝트 ‘아트 비전 시티 비전’을 진행하시면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으실까요?
이섭 당시 전광판이 운영되는 형식이 있었어요. 어떤 영상이든 90초가 조금 안 되는 길이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분량으로 편집한 작품을 두 시간에 한 번씩 보여주는 계약을 했죠. 뭐, 계약이라기보다는 전광판 운영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도와주신 거죠. 그래서 그 방식에 맞게끔 편집했었습니다.
SMB 도록에는 프로젝트 참여작가가 10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작가 10명의 작품을 모아 90초 이내 길이로 편집해서 같은 파일을 여러 장소에서 송출했다는 말씀이시죠?
이섭 네. 하지만 그 당시의 기술은 ‘송출’이 아니었어요. 전광판마다 시스템이 연결되어 있고 정해진 시간에 준비한 테이프로 틀어주는 방식이었어요. 마치 디스크자키가 플레이어에 핀을 올려놓고 음을 들려주듯이.
SMB 24시간 운영이었나요?
이섭 아니요. 24시간까지는 아니고, 새벽 한 두시까지는 했을 거에요. 처음 2-3일 동안은 약속했던 시간에 맞춰서 틀어주는지 현장에 나가서 지켜봤죠.
SMB 도록에는 작품을 틀어준 전광판이 서울만이 아니라, 수원, 부천, 인천, 부산에도 있더라고요.
이섭 당시는 서울에 전광판이 14개 밖에 없던 시절이에요.
SMB 그럼 서울에 있는 모든 전광판을 쓰신 거네요?
이섭 아마 강남 한군데서만 못했을걸요. 그리고 수원이나 부천 처럼 다른 지역에 있는 전광판은 사실 한 번밖에 확인을 못 해서 약속대로 계속 틀어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SMB 은행정보TV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셨나요?
이섭 은행에 홍보용 TV가 있었어요. 가령 ‘무슨 통장을 만드세요’ 라는 광고나 은행 내에서 지켜야 하는 예의범절에 관한 문자가 나오는 곳이죠. 기존 콘텐츠 사이에 저희가 요청한 영상을 시간당 한 번씩 보여주는 방식이었죠.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면 하루에 예닐곱 번 보여줬을 거예요. 그렇게 기억해요.
SMB ‘아트 비전 시티 비전’에 관한 반응은 어땠나요?
이섭 지금도 『한겨레』에서 활동하시는 노형석 기자가 막 미술기자로 일을 시작할 때인데, 그분이 이 프로젝트에 큰 흥미를 보였어요. 노기자와 함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사옥 전광판을 보려고 광화문 사거리에 나가서 행인들에게 무작위로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더군요. 전광판에서 노상 보여주는 광고와 다르지 않게 여겼어요. 아니, 그저 색다른 광고처럼 여겼지, 이게 ‘작품이구나’ 하면서 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SMB 기술 인력 섭외에도 어려움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기술적인 문제는 어떤 식으로 해결하거나 도움을 받았었는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섭 당시 작가들이나 우리가 쓰던 카메라로 찍은 파일로는 큰 전광판에서 제대로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기술 차이가 있었어요. 다시말해 기존의 작품 파일을 그대로 전광판에서 보여주지 못했죠. 색을 분해하고 다시 병렬하는 기술적 전환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방송국에서 영상 편집하시는 엔지니어를 찾아다니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전광판에 트는 영상 소스를 만드는 업체를 찾아가게 되었죠. 그런데 그분들은 전시 예산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액의 금액을 요구하시더라고요. 결국에는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작품을 틀기로 한 조선일보 전광판 기술자분들을 연결받아 어려움을 해결했어요.
SMB 전시장에서 소개되는 작품이 전광판에서 보여지면서 기획 의도처럼 전시장의 안과 밖/일상과 비일상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성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트 비전 시티 비전’에서 새롭게 편집된 이미지는 아까 말씀주신 ‘색다른 광고’ 이상의 효과가 분명 있었을 거에요.
이섭 전문가들보다 일반인들이, 그러니까 은행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분들이 흥미로운 반응을 보여주었던 것은 기억해요. 어쩌면 작품보다 드라마가 나왔으면 더 즐거워하셨을지도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행인들의 동선이나 움직임을 생각해보면 특정 전광판에 관심을 두기에는 90초 가까운 시간이 굉장히 길 텐데, 가던 길을 멈추면서까지 볼만한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예술품이라고 만들어진 영상들이 상업용 이미지의 임팩트 만큼 전달력 있는지 묻는다면, 저는 작품들의 호소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기억 못 하는 건 당연했고, 저희끼리만 재미있는 시도에서 멈췄어요.

SMB 홍순철 작가님의 〈도시폭포〉를 비롯해서 전시에서 소개했던 작품과 작가에 대해 조금 더 기억하시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이섭 그 작품에서 폭포 위에 있던 사람-작가 본인이 화면에서 바깥을 넘어 보는 것처럼 연출된 장면 하나가 기억납니다. 그리고 참여작가 중 박현기 선생님은 우리나라 비디오아트 1세대 작가잖아요. 우리나라에도 미디어아트를 선구적으로 했던 사람이 있었고, 미디어아트가 우리의 장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념하고 소개하기 위해 이분을 섭외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운영위원이었던 안상수 선생님하고도 많은 고민을 나누었어요. 미디어로서 타이포에 관한 얘기를 했고, 작품도 출품해주셨죠. 백남준 선생님 역시 역사적으로 기억될만한 꼭짓점들을 하나씩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출품해주셨죠.
SMB 전시장에서 기술적인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이섭 이 전시가 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개최된 첫 번째 전시였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전담하는 전문 인력이나 방향성이 없었어요. 작가마다 각기 다른 의견들을 가지고 있었고, 요구도 다 달랐죠. 유일한 방법이라면 작가들이 알고 있는 방향을 쫓아 거기에 맞춰주는 정도였습니다. 돌이켜보면 《1988-2002》 전시에 대해 그렇게 좋은 평가를 못 받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저희가 내부적으로 탄탄한 주제 의식을 가지지 못했었다고 생각됩니다. 시대적 흐름은 이해했지만 그 흐름에 담아야 할 내용을 관철하지 못했었고, 그만한 작가들을 모으지도 못했어요. 한편으로 돈 버는 방법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도 있었어요. 막상 전시 만드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반성하게 되면 참 힘들어요. 남들은 무시해도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고 믿어야 하는데. 이런 경험을 토대로 아트프로젝트서울은 일주아트하우스에서 미디어아트 교육과 제작 프로그램이 있는 공동 스튜디오를 구성하고 프로그래밍하는 두 번째 프로젝트로 옮겨가게 됩니다.
SMB 비엔날레의 시청각 자료에서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생산한 여러 작가들의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의 초기 실험작이나,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없는 분들까지 다양한 분들이 그곳을 거쳐갔고, 리서치 기반, 퍼포먼스 중심, 개념적 접근, 영화적 서사 등 형식적으로도 다양하면서 매우 지역적이고 환경적인 특색이 드러나는 시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작품들이 도시와 영상부터 출발해서 아트컨설팅서울이 시도했던 미디어 교육과 프로덕션 프로그램을 통해 파생된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도시와 영상 전시를 위해 할당된 예산은 기억나시나요?
이섭 7-8천만원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SMB 마지막 질문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 많은 이들이 시대적 전환에 관해 언급합니다. 그동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미디어아트에 관한 여러 사유와 해석을 만들어왔고, 이번 기회에 그동안의 자료들을 모아서 정리해 보니 근래의 미술적 시도들에서 과거에 이미 선행된 것들로 회귀하는 실천들이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향후 어떤 방향을 가지고 가야 더욱 유의미해질 수 있을까요?
이섭 의미가 생기려면 전환점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하지 말고, 전환점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고민하는 작가들을 발굴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한 번도 예술가라고 불려보지 않은 어떤 사람의 영상을 예술작품으로 초대하는 거죠. 예술에서 전환점은 예술작품으로부터 증명되니까요.
SMB 네,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더 해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이섭 보내주신 질문지 받고 생각했던 것이 있는데요.
이름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잖아요. 우리가 이 말에 얼마만큼 책임질 수 있는가? 그리고 ‘서울’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분석할 수 있을까? 대도시, 코스모폴리탄 등등 연상어들이 있겠죠. 또 서울이 그런 의미라면, 어떤 연관성으로 ‘서울’을 ‘미디어시티’라 부를 수 있는가? 혹은 서울은 ‘미디어시티’일까? 이런 반문도 따라와야 하고요. 그리고 어떻게 ‘미디어시티’가 되어야 할까?’ 는 자기반성도 있어야 하겠죠.
그리고 비엔날레라는 방식으로 미디어시티를 지향하는, 또는 미디어시티라고 자임하는 것을,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화하고, 퇴보하고, 정체하는 것들을 속살 드러내듯이 다 보여줄 수 있을까? 말/이름 속에 이런 고민과 생각들이 다 들어오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일자: 2022년 2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