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

양아치,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팀
양아치, 〈신용〉 스틸, 2018. 혼합 매체. 가변 크기. 작가 제공

본 인터뷰는 양아치 작가와 미디어아트와 비엔날레에 관해 나눈 대화이다. 2022년 보고서에 출판된 글에 2024년 관련 이미지를 더해 재편집하였다.

양아치는 미디어 시티 서울 2010 《트러스트》와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좋은 삶》 (2018)에 작가로 참여하였다. 2000년대 초 웹 기반의 작품과 활동을 통해 새로운 미디어의 가능성과 영향력을 사회, 문화, 정치적으로 탐구해왔다. 당대 한국의 풍경을 인터넷 홈쇼핑으로 비유한 〈양아치 조합〉(2002), 미디어가 지닌 스토리텔링의 영향력을 실험한 〈미들 코리아: 양아치 에피소드 I II III〉(2008-2009), 도시의 CCTV망 속에 존재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담은 〈밝은 비둘기 현숙씨, 경성〉(2010) 등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작가는 2010년 제11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수상하였으며,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연구명 미디어아트

분류 인터뷰

에디션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사전프로그램(프리비엔날레)

참여자 양아치,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팀


SMB 2000년 초부터 ‘웹 아티스트’로 알려지며 미술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2002년에 일주아트하우스에서 개인전 《양아치 조합》을 발표하셨고요. 첫 개인전에서 시도했던 것에 관하여 설명 부탁드립니다.

양아치 먼저 용어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요. 통상 한국에서는 ‘웹 아트’라고 말하지만, 그 시작은 아시다시피 ‘넷 아트’ 혹은 ‘넷닷아트’입니다. 한국에서는 편의상 ‘웹 아트’로 자리 잡은 것 같아요. 제가 한국에서 활동하기 전 보스턴에 있었습니다. 보스턴에는 여러 대학이 모여 있어서 1990년대 새로운 활동의 중심에는 자연스럽게 인터넷이 있었어요. 당시 전 개방형 수업을 청강하며 자유롭게 여러 학교를 드나들었고, 그러면서 학교에서 활동하는 교수님과 학생들을 알게 되었죠. 지금 와서 보면 그분들 중에는 대단한 기업 대표, 저명한 학자나 활동가가 있었어요. 그리고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사실 자체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있었습니다. 서울의 한강처럼 보스턴의 찰스강과 그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만남, 그리고 인터넷에서의 활동…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인상적인 일들이 벌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그동안 알던 방식으로 사람들이 만나고 흩어지지 않고 ‘인터넷으로 새롭게 조직’하는 감각이요.

1996년부터 ‘중국 로봇’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IMF가 터져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한국에 와서는 거꾸로 한국의 예술가들을 (인터넷을 통해) 밖으로 소개해야겠다는 마음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인터뷰했습니다. 당시는 대안공간이 시작되던 시기였어요. 그리고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학생들이 기존의 미학과 차별적인 활동의 기저이자 현상으로 웹을 상정하고 논문들을 쓰던 때였고요. 저도 자연스럽게 그런 관심을 가진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때 알게 된 분중에 윤재갑 큐레이터, 김장언 큐레이터가 있습니다. 당시는 이분들이 웹 문화에 열정적으로 몰입하고 계실 때예요. 그러니까 2000년 이후 ‘넷 아트’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제 관심사나 경험에는 이런 기억들이 있습니다.

SMB 인터뷰를 다니시면서 어떤 분들을 만나셨나요?

양아치 너무 옛날이라 한 사람 한 사람 기억하기가 어려운데. 지금처럼 유튜브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그때는 ‘언더그라운드’라는 말이 있었잖아요? 지금은 언더그라운드(하위문화)를 유튜브가 다 소집해 버려서 ‘언더그라운드 씬’이라고 볼 수 없지만, 당시 한국에는 그런 문화가 있었죠. 전 그와 같은 문화에서 자생하는 타투이스트,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SMB 다시 말하자면 매체 중심보다는,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비롯한 창작 생태계 저변에 관한 관심에서 미술 활동이 비롯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미술계에서 ‘넷 아티스트’로 소개된 거고요?

양아치 한국에 오자마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건 이곳에서의 미디어 활동에 애착을 두게 되면서예요. 당시 미술계는 웹은 고사하고 미디어라는 말도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죠. 미술에서는 ‘뉴미디어’라는 장르 특정적 작품과 비디오아트를 주로 다루던 시기예요. 그건 다른 의미잖아요. 지금은 미디어가 굉장히 입체적으로 이해되지만, 당시에는 미디어를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미디어 활동은 해야겠는데, 미술은 아닌가 보다 생각했죠. 같은 시기 어떻게 인연이 되어서 진보 네트워크 https://www.jinbo.net/ 와 연결되었고, 이곳은 당시 제가 추구하는 바와 좀 닮아 있었습니다. Bulletin Board System이라는 게시판 문화가 있었잖아요? 당시 진보 네트워크에서 BBS의 오픈소스 개념을 실제로 가공하고 만들어내는 일들을 했어요. 웹 사이트를 만드는 것이 굉장히 비쌌던 시절이거든요. 적게는 오백만 원에서 비싸게는 몇천만 원 할 때예요. 진보 네트워크가 오픈소스로 관리자모드를 세팅해주는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저는 이런 기술을 미술 쪽에 연결해주고 싶었어요. 그즈음에 만들어진 것이 이주민 네트워크 웹 사이트예요. 노동 네트워크도 있었죠. 노동 운동과 미디어가 만나서 현장을 기록하는 영상이 바로 해외로 전달됐고요.

그러니까 예전의 ‘놀이패’ 같은 모임이 일종의 ‘비디오패’가 되어서 노동 운동의 일상을 기록하고, 유포하고… 당시 한국에서는 인터넷을 엘리트 중심으로 만들어진 문화로만 여기던 시절이었는데, 진보 네트워크 혹은 노동 네트워크에서 실질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이게 미술이고 문화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런 일들이 먼저 벌어지고 난 한참 뒤에 ‘웹 아트’라는 말이 나왔어요.

양아치, 〈양아치 조합〉, 2002. 웹 프로젝트(yangachiguild.com). 작가 제공

SMB 처음 ‘미술계’에서 활동하시면서 미디어에 대해 공유하는 언어나 이해가 다르셨을 것 같아요.

양아치 여전하지요. 이 인터뷰에서도 바로 ‘웹 아티스트’로 시작했고… 당시에도 어떤 논란이나 논의 없이 바로 ‘웹 아트’가 되는 것이 저로서는 좀 신기했어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술을 직업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일주아트하우스에 지원했습니다. 당시 일주아트하우스는 공공미디어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만들었었고, 그 방향성이 저와 정말 잘 맞아떨어졌어요. 미디어는 그 속성상 당연히 공공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일주아트하우스 프로그램 주최 측은 미술에서 이야기하는 ‘비디오아트’를 넘어서서 미디어의 개념을 확장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그들이 찾던 아티스트에 저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 역시 미술을 그렇게 바라보는 분들이 필요했고요.

그런 상황에서 데이터를 중심으로 구성한 웹 프로젝트 〈양아치 조합〉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저는 당연히 데이터를 제일 중요하게 봤는데, 한국의 미술씬에서는 플래시를 더 주목했어요.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졸라맨’ 같은 애니메이션 중심의 콘텐츠가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라고 할 만큼 붐이었고, 누구나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툴이 플래시였어요. 미술에서는 이런 툴로 생산된 것들이 빠르게 시각화가 되니까 주목했던 것 같아요. 데이터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본의 아니게 저밖에 없게 된 거죠. 모두가 플래시를 했던 시절에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만한 용어로 ‘웹 아트’가 있었고… 타이밍이 그랬던 거죠.

SMB 당시 일주아트하우스에서 공공미술의 연장에서 미디어아트를 위한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새롭게 구성했었다고 들었어요. 이 프로그램은 미디어아트 제작 시스템과 작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 결합한 모델처럼 이해됩니다. 미디어라는 매체로 이루어진 미술 생산에 공공성을 인식하고 이식하는 작가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인거죠. 관련해서 더 기억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양아치 너무 많은데요. 우선 프로그램 기획자가 박삼철, 이섭 선생님이셨어요. 두 분이 너무 중요한 분들이었고. 백남준아트센터 계시는 이채영 큐레이터나 제주도에서 문화공간 양 운영하시는 김연주 큐레이터도 있었고. 이런 분들이 정말 큰 노력으로 한국의 미디어아트에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미술계가 꼭 기억 해야 하는 인물들이에요. 작가들은 그 뒤에 많이 나왔죠. 배영환 작가나 임흥순 작가도 거기에 있었어요. 너무 많죠. 보통 레지던시라고 하면 공간 지원을 생각하지만, 그곳에서 이뤄졌던 것은 미디어 교육이에요. 기본적으로 장비 교육이 있었고요. 미디어 작업에서는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단순한 공간 지원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많고… 그분들이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SMB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2000년 서울시 주관으로 기술, 예술, 산업이라는 세 다른 분야를 아우르는 대규모 축제로 처음 조직되었습니다. 2002년부터 미술관 주관 사업으로 전환되면서 지금의 규모로 쭉 지속되어왔고요. 초기에는 기술의 발전이나 효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미디어아트에 집중했었던 반면, 작가님이 참여하셨던 2010년을 기점으로 미디어아트의 주체가 조금 더 예술로 이동했었던 것 같습니다.

양아치 그 당시에는 예산의 규모도 규모지만, 미디어를 도시하고 엮으려는 노력이 많았는데, 당연한 거잖아요. 그런데 미술로 들어오면서 그게 당연하지 않은 상태로 되어버렸고요. 미술의 동력은 기본적으로 해석과 번역인데, 이 해석과 번역이 미술관 안에서만 이루어지다 보니 도시와 전혀 연결되지 않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도시의 알고리즘과 만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미학적인 태도와 행동들이 참 대단했다고 생각해요.

SMB 초기의 미디어_시티 서울에서 소개되는 작품과 도시 곳곳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미디어 간의 간극이 있었다는 말씀이시죠? 관련하여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양아치 민중미술 계열 선생님들이 미디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논란을 재미있게 기억합니다. (웃음) 지금은 생각도 못 할 텐데… 선생님들이 저를 찾아와서 ‘웹 아트’를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달라고 한 적도 되게 많았고요. 미학적으로 ‘웹’과 ‘민중’이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거라고 보는데, 선생님들이 겪은 세월 간에 틈이 있다 보니 웹이나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하셨거든요. 어쨌든 그렇게까지 알고 싶어 하시는 걸 굉장히 흥미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시 미술에서 ‘웹 아트’는 데이터가 아닌 플래시(형태로 보여주기)를 선택함으로써 실질적인(디지털적인) 작동 방식을 전달 못 하게 된 것 같습니다.

SMB 제 6회 미디어 시티 서울 2010 《트러스트》에 출품하셨던 작품 〈밝은 비둘기 현숙 씨, 경성〉은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이기도 합니다. 작품은 덕수궁이 내려다보이는 미술관 옥상에서 촬영되었고, 주변 환경에 어우러진 동시대 서울의 서사가 작품으로 들어오지요. 이 작품을 어떻게 구상하게 되셨나요?

양아치 아시다시피 ‘감시’가 제 작업의 키워드잖아요. 예를 들어서 〈밝은 비둘기 현숙 씨, 경성〉은 CCTV 환경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좀 들여다보자는 것에 초점이 있었고요. 적게는 6채널에서 많게는 13채널을 이용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눈을 비롯한 도시와 연결된 눈을 통해 감시와 역 감시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때는 미디어아트라고 하면 굉장히 차갑고, 건조하고, 직선 중심의 조형성… 이런 이해가 있었는데 전 그게 싫었어요. 완전히 녹아들기를 바랐고, 그냥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하나의 사물처럼 보이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그렇게 보여줬고요.

그리고 말씀하신 옥상에서 공연은 서울시청에서 노동 운동 시위가 있을 때 촬영했어요. 그 소리가 전시에 방해가 될 정도로 컸거든요. 그리고 주변에 성공회 교회가 있잖아요, 6시만 되면 종을 쳐요. 그 시간에 촬영을 위한 공연을 했었거든요. 하지만 제게는 미술관 옥상에서 보고 듣는 전체적인 풍경이 너무 아름답더라고요. 한쪽의 시위 현장에서는 앰프를 크게 틀어놓고 소리 지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또, 6시가 되니 퇴근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질서와 무질서를 옥상에서는 다 볼 수 있잖아요. 작품은 그런 풍경 전체를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구성했습니다.

양아치, 〈밝은 비둘기 현숙 씨, 경성〉스틸, 2010. 2채널 비디오(컬러, 사운드). 12분, 3분 2초.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작가 제공



SMB 웹의 네트워킹을 활용하는 작품에서 출발해서 연출된 상황을 통해 도시의 감시망과 미디어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고 다시 현대의 공동체를 질문하는 작품까지 이어지는 궤적이 흥미롭습니다. 이런 변화를 비엔날레의 진행과정과 평행하게 읽어볼 수 있고, 또 미디어아트 역사라는 다른 축에서도 읽을 수 있고요.

양아치 음, 제 작업을 들여다보는 분들이 “변화가 너무 많지 않냐”는 말씀을 많이 하세요. 조형적인 변화는 있을 수도 있지만, 개념적인 측면이나 주제 의식은 거의 같아요. 저는 감시와 역-감시, 스크린, 그리고 네트워크 안에서 유동성이나 위치… 등의 문제를 계속해서 탐구해왔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위치를 보통은 사물이라고 얘기를 하죠. 최근에 사물 얘기가 많은데. 제가 첫 개인전에서 보여준 것이 〈양아치 조합〉이잖아요. 당시에 제가 제안했던 건 ‘이메일로 사물을 보낸다’라는 개념이예요. 즉, 데이터를 보낸다는 개념인데, 당시는 그런 개념이 없을 때요. 지금은 사물을 주체(Object)로도 보고, 객체(Thing)로도 보는 등 개념의 확장이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는 데이터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죠. 물론 소수의 네트워크 관련자들은 전문 용어를 사용하긴 했습니다.

현재 제 작품은 조형적으로 다른 선택을 하지만, 여전히 ‘가상성’을 관통하고 있어요.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모두 웹/넷이 가진 가상성을 전시공간에서 이어갑니다. 저는 계속 던져보는 거예요. 그때는 웹을 가상공간이라고 말하지 않았죠. ‘확장된 현실’, 이런 식으로 얘기했지. 가상공간에는 물리적인 힘이 없잖아요. 실제 공간에서 작동하는 중력의 힘이 X, Y, Z값으로 전환되어 가상으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그리고 요즘 신체 얘기를 많이 하지만, 그때는 신체가 개입할 수 없는 공간에 대해서 도대체 이게 뭐냐는 식의 논란이 재밌었는데… 하여튼 그런 가상성에 대한 애착이 이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현실 공간의 가상성 안에서 조형적으로 선택하는 원근법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요.

〈밝은 비둘기 현숙씨, 경성〉에서 CCTV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의 원근법을 가져옵니다. 《갤럭시 익스프레스》(바라캇컨템포러리, 2020)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라이다(LiDAR)라는 미디어 툴을 알게 되었어요. 도시 스캐닝 장비인데요. 예를 들면, 도시를 스캐닝하면 어떤 피사체의 데이터를 얻을 수 있는데, 초당 포인트가 1억 개 이상 나오거든요. 여기서 포인트라는 것이 데이터값인데, 그 값 자체가 시점이 되고 피사체가 될 수 있는 기술이에요. 정말 반가웠죠. 완전히 개방된 형태의 원근법을 만났으니까. 그래서 이걸 미술 작업으로 풀어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이 미술 언어를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조각적인 형태로 작품들을 완성했고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요. 아무튼 제 작품은 개념적으로 예전부터 관심 있었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아웃풋-보여지는 방식이 너무 달라 보인다는 해석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SMB 〈신용〉(2018)에 관한 구성이 출발하게 된 배경과 기술적으로 새롭게 혹은 다르게 시도했던 부분은 무엇일까요?

양아치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의 주제가 ‘좋은 삶’이잖아요. 저는 이 주제가 ‘풍자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알고 있는 ‘뉴노멀’은 이런 게 아닌데, ‘의식주’라는 의제가 예술을 통해서 어떤 좌표를 가질 수 있을까도 궁금했고, 큰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상황이 너무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당시 전 금융이나 자본의 문제를 공부하고 있었고요. 지금은 비트코인이나 블록체인 같은 개념이 우리 일상으로 들어왔지만. 당시는 보편화 되기 전이거든요. 블록체인 개념의 핵심은 ‘신용’이에요. 기존의 화폐가 중앙은행에 신용을 주도할 권리를 준 것이라면, 가상화폐는 그 신용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죠. 저는 그 지점이 중요하다고 봤어요. 완전히 준비는 안 되었지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신용〉을 작업했습니다. 작품에서 가상화폐 개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아요. 가상화폐를 둘러싼 미디어적 환경과 풍경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SMB “미술 언어에 대한 지지”라고 표현하셨는데요. 그게 기술과 예술이 만날 때의 균형이라고 해야 하나… ‘예술’이라는 개념 만큼이나 ‘기술’이라는 개념도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기술을 통해야만 발언할 수 있고요. 작가님은 미디어아트를 어떻게 규정하시나요?

양아치 지금 질문에 중요한 지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예술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기술은 정말 중요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술과 기술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당연히 기술이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현대미술은 해석과 번역으로 이루어지는 어떤 힘이에요.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만 이야기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우리가 이세돌의 퇴장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둑에서 최고의 해석과 번역을 하는 인간이 승패를 떠나 해석과 번역의 기술인 빅 데이터를 만나면서 바둑계를 떠납니다. 그런데 미술은 아직도 해석과 번역을 하고 있지요.

저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기술이라는 측면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기존의 번역과 해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과 같은 운영 방식은 사람이 달라질 뿐이지 기술과 예술에 대한 해석의 알고리즘으로 계속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해석과 번역이 아닌 무엇이 있냐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겠죠. 저도 답을 찾고 있는 사람인데…어쩌면 그것이 ‘동사형’에 있지 않나 생각해요. 우리말과 사유에서 동사형의 업데이트가 안 돼서 (다양한) 명사를 활용 못 하는 상태가 되는 거 같아요. ‘큐레토리얼’은 명사 중심이 아니라 동사 중심이 되는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죠. 기존의 것들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개념과 조형 방식을 찾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동사의 문제에 접근해봤으면 좋겠다는 거죠.

SMB 여기서 말씀하시는 동사는 개념이나 관념을 작동시키는 행동을 의미하나요?

양아치 정답이라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닌데요. 사물을 주체(Object)과 객체(Thing)로 나누잖아요. 객체는 알려진 바와 같이 ‘Internet of Things’에서 말하는 정보 전달을 기초로 하는 사물 네트워크를 의미하죠. 그런 맥락에서 미술은 객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 지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미술은 전기 전자 네트워크 연결 덩어리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미술은 너무 위기인 거예요. 단순히 전기 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연결 방식 맥락에서 기술과 예술이 모두 명사니까요. 지금 두 분 앞에 놓여있는 그 책상이라는 지극히 제한적인 사물에 불과해 버리는… 그렇지만 객체로서 사물은 변신할 수 있죠.

그동안은 사람들이 해석과 번역을 통해 책상(미술)을 해체도 하고… 여러 노력을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어차피 해석, 번역, 그리고 시장 맥락에서만 존재한다는 걸 알고 나니 흥미를 잃은 게임처럼 되어버렸는데. 이 부분에서 ‘동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거예요. 어제 참석했던 어떤 포럼에서 한 선생님이 젊은 작가들을 비판하시기에 근거가 뭔지 좀 들어봤는데 신체 없는 활동을 비판하시는 거더라고요. 아쉬웠던 점은 요즘의 신체는 여러 미디어 환경에서 여러 아이디를 통해 한 백 개쯤은 되는 거잖아요? 각 신체를 발행하는 신체적 감각이 모두 다르고요. 그래서 저는 사물을 주체와 객체로 구별하는 관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사적 관념이 그동안 미술에 축적된 한계를 극복하고 완전 다른 형태로 업데이트 시켜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SMB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방식으로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를 반복하는 건 승산 없다고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이런 인터뷰도 다른 무엇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 같아요. 방향성 점검이 필요한데, 상황에 여러 가지가 맞물려 있어요. 코로나19로 대두된 환경의 변화, 제도적 차원에서 패러다임도 달라졌고, 그리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라는 사업명 자체는 매우 구체적이면서 계속 변화하는 특정성을 향하고 있고요. 앞으로는 그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 그리고 비엔날레가 지속되어햐 하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질문드립니다.

양아치 저는 당연히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애정이 있고요. 선생님들이 그런 장을 열어주어 너무 기뻤어요. 미국에서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서울에서 했으니까요. 그리고 작업적 취향을 떠나, 어쨌든 제가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도시 전체로 흩날리고… 너무 당연한 듯이 미디어와 도시는 어울리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면 좀 초라해지는 거예요. 해석과 번역만을 위한 장소니까,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커리어 쌓기 정도로 느껴지는데. 그런 가운데 저는 일종의 신호 같은 걸 봅니다.

우리 주변에 너무나 큰 이슈들이 많잖아요. 예를 들면, 최근 자주 이야기되는 AI를 미술 쪽에서는 자꾸 ‘AI 아트’로만 생각하지요. 그 다음에 모빌리티가 나오면 또 ‘모빌리티 아트’, 로봇이 나오면 또 ‘로봇 아트’. 뭐만 하면 다 아트래. 작년에 한참 시끄러웠던 AI 챗봇 ‘이루다’ 사건 같은 경우, 거기에는 기술과 데이터 계산법으로 이루어내는 이상한 알고리즘이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사건을 미술에서는 성희롱이라는 윤리적 시선으로만 다루니 사건을 슬기롭게 못 쓴 거죠. 물론 윤리적인 비판이 필요하지만, 거기에 미학적인 비판이 함께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예로 2018년 KT 아현지사 화재가 일어났을 때 서울에서는 한동안 데이터를 쓸 수 없었잖아요. 거기서 일어나는 ‘뉴노멀’이 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죠. 이렇게 우리 삶이 미술에 먹이를 던져주고 있거든요. AI 쪽 개발자들은 키워드랑 이미지 몇 개 입력하면 입체주의도 만들고 표현주의도 만든다고 그럽니다.

예술가들은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예술의 힘은 그것을 해방하는 데 있는 거니까요.

인터뷰 일자: 2022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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