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담자

길예경,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구 서울 600년기념관) 방문 시 촬영한 전경, 2016. 사진: 정주영

본 인터뷰는 제9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길예경 편집위원과 비엔날레와 편집, 출판과 콘텐츠에 관해 나눈 대화이다. 구술 녹취를 편집한 글과 관련 이미지 자료들, 인터뷰이의 약력을 수록하고 있다.

길예경은 서울과 제주에서 활동하는 독립 편집자이자 번역가이다. 실험미술을 공부한 후 여러 미술 및 디자인 매체에서 객원 기자로 일했다. 2016년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에서 『그런가요』 편집 위원 및 도록 공동 편집자를 맡았다. 2022년 ‘2022 세마피칭: 기록하는 미술관, 기억하는 미래’(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포럼에 참여하였고, 2023년 『문예 비창작: 디지털 환경에서 언어 다루기』(케네스 골드스미스 지음, 워크룸 프레스)를 공동번역했다. 현재 사회, 정치 포스터로 구성한 책을 교정하고 있다.



연구명 전담자

분류 인터뷰

에디션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사전프로그램(프리비엔날레)

참여자 길예경,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2022년 처음으로 비엔날레 전담팀을 구축하고 가장 먼저 비엔날레의 정체성을 점검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1996-2022 보고서』 (2022, 서울시립미술관)는 1996년 제1회 도시와 영상부터 2023년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사전프로그램(프리비엔날레) 개최까지 27년간의 비엔날레 데이터를 정리하고, 비엔날레 운영과 구조의 전개 과정을 파악하며, 국내외 미술 현장의 변화와 더불어 진행되어 온 비엔날레의 변천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책은 비엔날레의 서사를 정체성 형성기(1996-1999), 형식의 구축(2000-2006), 과도기(2008-2012), 미술관과 비엔날레(2013-2018), 미디어아트(2019-2022) 다섯 분기로 나누어 시기별로 달라지는 비엔날레의 구조적 변화, 그리고 역할에 따른 전문성을 구분하여 기획/연구(이섭), 과학/기술(원광연), 작가/미디어(양아치), 관장/운영(김홍희), 미디어/기록(김경호, 홍철기)을 인터뷰하였고, 개인의 경험을 통해 비엔날레의 복합적인 진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 자료로 수록하였습니다.

2024년 연간 개최되는 제13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사전프로그램(프리비엔날레)은 지난 사전프로그램과의 연속성을 가지며, 미디어에 관한 개념적 연구, 비엔날레의 정체성과 지역적 연계성을 탐구하기 위한 내용들을 준비중에 있습니다. 본 인터뷰는 지난 인터뷰의 연장에서 최근 10여 년간의 비엔날레 경험에 초점을 맞춰, 변화해간 동시대 현장에서 새로운 역할을 만들어주신 전문가들을 초대하고 기록하고자 합니다. 9회 비엔날레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2016)는 특히 출판과 프로그램 부분에서의 완성도와 다양성에 괄목할만한 성장과 성과를 보여줍니다. 길예경 편집위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비엔날레라는 행사에서 에디토리얼의 역할, 인쇄 매체에 수록되는 콘텐츠 생산의 복합성, 미래의 비엔날레를 위한 전언 등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SMB 2016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배경이 궁금합니다. 이전에도 비엔날레와 같은 행사에서 독립적인 출판물을 기획하고 제작하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미술 실기를 전공한 뒤, 예술 출판은 미술자료, 아카이브, 말과 글, 인쇄물에 대한 관심 때문에 시작하였고, 제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서 아카이브와 도서관을 맡았던 선생님의 최근 활동을 참고하였습니다.

길예경 저는 국문과나 영문과를 나오지 않고 미술을 전공하였고 미술 출판과 관련한 일은 한국의 전시 도록이나 미술 출판물에 영문이 많이 등장하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영문 번역과 교정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서서히 교정보다 범위를 넓혀서 여러 편집 일들을 맡게 되었습니다. 대게 한글로 쓰인 원문을 영어로 옮기면, 한글에는 필요 없지만 영문에만 각주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전시나 작품처럼 글도 각주 없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미술에 등장하였고, 이렇게 영문으로 번역된 원고의 각주와 해설을 쓰면서 편집 일의 범위가 넓혀졌습니다.

과거에 편집과 출판 관련 일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일을 하게 되면서 저도 자연스럽게 비엔날레와 연결된 것 같습니다. 인사미술공간에서 출판했던 저널 『볼』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며 8회 비엔날레(2014)의 박찬경 예술감독님을 알고 있었고, 구정연님이 맡은 《귀신 간첩 할머니》의 도록 편집 회의에 저와 박소현 교수님이 참여하며 필자를 추천한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널 『볼』이 도큐멘타 12와 7회 광주비엔날레의 초청을 받고 참여한 프로젝트에서 9회 비엔날레의 백지숙 예술감독님과 여러 차례 출판 일을 함께 하였고, 매체와 편집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런 협력의 연장에서 2016년 비엔날레에 참여를 제안받았어요.1

그리고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고 재미있는 일화도 있지만, 포함하여 저의 경험을 어떤 형식으로 남기면 좋을지에 관하여 현재도 고민 중입니다. 제가 보고 배운 편집과 출판 기획은 정해진 과정이나 형식이 있기 전에 뜻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무언의 과정에서 생산되는 결과들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 한국 미술계는 제도가 완전히 형성되기 전 단계에서 가질 수 있는 가변성 때문에 더 흥미롭다는 해외 전문가의 의견도 있습니다. 저 역시 지금까지는 ‘성좌’를 찾아내듯이 새로운 과정 자체가 더 즐겁습니다. 이런 경험을 정리한다면 형식적으로 블로그가 맞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하긴 했습니다. 제가 요즘 참고하는 게리 판 노르트(Gerrie van Noord) 편집자의 경우 자기 블로그를 운영합니다. 안양공공 일을 할 때는 개인적으로 과정을 기록할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동안 여러 출판물에서 ‘편집’이라는 공통된 이름이지만 교정, 교열, 필자 섭외 등 조금씩 다른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언젠가는 그동안 참여했던 출판물을 ‘주석을 단 연표’로 만들어 서로 간의 관계성을 살펴보고 싶기도 합니다.

SMB 2016년 비엔날레의 「열린출판회의」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2015년에 개최된 사전프로그램(프리비엔날레)의 포문을 연 것이 이 출판회의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과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열린출판회의」라는 이름의 첫 공개 회의 자리에서 2년에 한 번 열리는 일회성 이벤트를 확장시킬 수 있는 독립적인 매체이자 도구로 출판물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출판물 제작에 관한 논의를 공개된 자리에서 하는 것은 비엔날레 사상 처음 시도된 일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는지, 4명의 책임 편집자, 그래픽 디자이너가 사전 회의를 하는 등의 전반적인 구성 과정과 이면의 이야기들을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길예경 9회 비엔날레(2016)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강유미님이 잘 아는 내용이어서 최근 전화 통화로 문의했습니다. 예술감독과 큐레이터 이지원님 두 분이 구상한 것이라고 합니다. 비엔날레 전시팀에서 결정 후 강유미님이 저를 비롯하여 게이코 세이, 치무렝가(응토네 에자베), 미겔 로페즈, 장문정 등 편집위원 다섯 명에게 연락을 취하고 모든 관련 행사와 결과물 제작을 진행했습니다. 이면의 이야기라면 ‘그런가요’2라는 제목이 떠오릅니다. 「열린출판회의」 내부 회의에서 1~4호 전체를 위한 명명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이 타진되었습니다. 제가 전시 공간 시청각에서 시각 문화 연구자 윤원화님과 어느 미술가가 나누던 대화에서 여러 번 들은 ‘그런가요’를 제안했고, 전시팀에서도 다른 예술가/디자이너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라는 의견을 주었어요. 다른 편집위원들도 ‘그런가요’에 동의한 데에는 그것이 예술가로부터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SMB 「열린출판회의」 기록 영상을 통해 당시 현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1회 회의의 내용은 비엔날레 도록(358-367쪽)에도 정리되어 있습니다. “미래”, “지식”, “언어”라는 소주제에 따라 편집자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선생님은 모더레이터 역할을 맡으셔서 주로 질문을 던지셨는데요. 이 세 가지 주제는 ‘비엔날레’와 ‘출판’이 다른 매체로서 차별성을 가지지만 서로 간의 상호 관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비엔날레는 시간에서 자유롭지 않고 한시적이지만, 출판은 미래에 다시 읽힐 수도 있고,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활용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소통과 공유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지만, 활용되는 언어와 소통 방식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회의를 진행하면서, 독립적인 출판 프로젝트이면서 동시에 비엔날레와 연계성을 가지는 것에 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시된 이 세 가지 주제어에 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길예경 출판물과 비엔날레의 연계성에 관한 질문이라면 독자와 관객이 살고 있는 시공간입니다. 독자는 관객일 수도 아닐 수도, 관객 역시 독자일 수도 아닐 수 있으며,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저는 도큐멘타와 뮌스터조각프로젝트를 관람한 적이 없지만 그들이 사전 프로그램으로 제작, 출판한 글을 읽은 독자입니다. 그들의 전시도록은 구매하거나, 도서관에서 보거나, 전시 웹사이트에서 봅니다. 직접 유럽에서 전시를 본 사람들이 쓴 잡지 기사를 읽기도 하고요. 도큐멘타도 회차마다 별도의 출판팀을 꾸린다고 들었습니다. 뮌스터조각프로젝트는 설립자이자 총감독인 카스퍼 쾨니히(Kasper Konig)가 여러 개념 미술가와 책을 만들었던 출판인이라 10년마다 열리는 미술 행사를 알리는 출판물이 나오면 기대를 품고 읽습니다. 비엔날레 출판이 단행본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요즘 사회학자가 쓴 책을 읽고 있는데, 알고 보니 도큐멘타에 참여한 프로그램에서 시작되었고, 얼마 전,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도록에 실린 티머시 모턴의 글을 포함한 책인 『하이퍼객체: 세계의 끝 이후의 철학과 생태학』의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2016년 비엔날레만 해도 여름캠프 〈더 빌리지〉(함양아 기획)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단행본(『모두의 학교: 〈더 빌리지〉 프로젝트』, 2016, 미디어버스)으로 나온 덕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미래는 이미 이곳에 있다—단지 균등하게 퍼져 있지 않았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 – it’s just not evenly distributed.)

과학소설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열린출판회의 1」에서 제가 했던 말이고, 2016년 시드니 비엔날레(예술감독 스테파니 로젠탈)의 전시명이기도 합니다. 깁슨은 본인이 언제 어디서 이런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튀어나왔을 것이고 이런저런 인터뷰에서 말하면서 알려진 것으로 추측한다지요. 시드니 비엔날레를 주최하는 호주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 웹사이트의 소개 글에 의하면 당시 시드니 비엔날레는 ‘지금’(now)과 정보 격차에 관한 전시임을 표명했습니다. 미술가들이 작업에서 어떻게 지식 생산(담론)과 이야기하기(서사)에 접근하는지, 또 어떻게 그런 두 가지 방법론을 교차해 가면서 새로운 실천을 선보이는지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예술이라는 언어는 관객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한편 멀리 달아나게도 합니다. 그럴 때 다양한 실험적 글쓰기가 기존의 비판과 비평에 더해 다른 측면에서 관객을 독자로 초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여름캠프 〈불확실한 학교〉 연계 전시 ‘상호의존’.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16. 사진: 길예경

SMB 「열린출판회의」가 총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되고, 공개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별도 자료로 남겨지지 않은 1회차 이후의 회의에 대해 기억나는 것을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길예경 「열린출판회의」는 1회차 이후 다시 편집위원 다섯 명과 두 차례 더 개최할 계획이 있었다고 강유미님에게 들었습니다. 각 호가 모두 발행된 후, 비엔날레 중 또 한 번이요. 물리적으로 서로 너무 다른 시공간에 있다 보니 어려움이 있었고, 「열린출판회의 2」(게이코 세이, 윤향로, 파릿 치와락)와 「열린출판회의 3」(길예경, 리즈 박, 미겔 로페즈)로 개최되었습니다. 당시의 현장 사진과 대화 내용은 간략하게 도록에 실려 있습니다. 두 모임은 서울시립미술관 3층의 프로젝트갤러리에서 열렸고 작은 공간이라 공지를 통해 20여 명이 모였지요.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의 1차 자료는 아니지만, 저는 「열린출판회의 3」에서 관련한 소식으로 도큐멘타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의 출판물을 소개했습니다. 모두 행사가 열리기 전에 나온 것입니다. 도큐멘타 14는 아테네에서 발행하는 문화예술 반연간 저널인 『사우스』(South as a State of Mind를 줄여서 부름)와 함께 만들었는데, 그것을 당시 서울시립미술관에 입주한 서점 더북소사이어티에서 발견하고 준비했어요. 2017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가 발행한 전자 소책자인 『아웃 오브 바디』(Out of Body)와 『아웃 오브 타임』(Out of Time)은 종이에 여러 부수를 출력하여 가져갔습니다.

SMB 당시 회의에서 주고받았던 이야기들이 현시대에도 유효하다고 생각됩니다. 재난이나 불확실성과 같은 것들이 여전히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고, 열린 공간으로서 미래에 대해 예술이 말할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회의 자리에서 자유로운 발화와 다양한 언어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언급되었고, 관객과의 질의응답 도중 당시 한국 사회를 관통하던 재난에 관한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던 김희진 기획자님에게 직접 마이크를 넘기기도 하셨는데요. 당대의 사회적 이슈, 공통의 기억, 집단적 트라우마를 살펴보는 것은 미디어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본 비엔날레의 중요한 역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2016년의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동시대에 펼쳐졌던 다른 국제교류 문화예술행사나 기획전시 등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었을까요?

길예경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날, 특히 ‘전원 구조’가 오보였음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대다수의 문화예술 종사자는 활동을 줄이거나 멈췄습니다. 그로부터 일 년 후 2015년부터 전시팀이 2016년 비엔날레를 준비하면서 숙고했던 수많은 결정은 미술가와 작품 선정, 비엔날레 전시팀에서 붙이는 모든 명칭, 비엔날레 아이덴티티, 전시, 퍼포먼스, 출판, 대화, 워크숍 등에서 형상화되어 나타났을 거예요. 비엔날레에 전시된 미술 작품이 마음을 움직이고 정신에 변화를 주고 행동으로 이끄는 과정은 사람마다 너무도 달라서 어려운 질문입니다. 비엔날레를 만든 사람들, 거기에 참여한 사람도 그럴진대, 관객 대부분은 몇몇 작품과 통하고 몇몇 워크숍만 체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미술인이자 시민인 저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서울시에서 지원하고, 서울시립미술관은 시의 주요 문화기반시설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 서울시립미술관의 가장 큰 분관인 북서울 미술관에서 열렸던 〈불확실한 학교〉 참가자 전시 《상호의존》(최태윤 기획)은 전시 자체로도 좋았고, 크리스틴 선 킴이 SeMA-하나 미디어 아트상(코랏크릿 아룬나논차이와 공동 수상)을 받음으로써 이정표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농인’, ‘정상성’, ‘장애’, ‘비장애’라는 낱말을 생각하거나 입에 올릴 때마다 가슴이 ‘쿵’하고 울립니다. 말씀하신 미디어 실천의 의미는 2016년 비엔날레 도록을 읽다 보니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에 대한 대화」(백지숙, 게이코 세이, 마정연)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독자에게 일독과 재독을 권합니다.

SMB 『그런가요 1호: 삼인조 가이드』는 당시 한국의 미술 상황과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이 관찰한 문제들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임을 통한 공동의 글쓰기와 개별 지식의 교환은 「열린출판회의」의 방식에서 영감을 얻게된 것일까요? 『삼인조 가이드』 는 명확한 주제를 드러내기 보다는 2015~2016년 사이의 서울과 미술에 관한 막연하고도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펼쳐졌는데, 이와 같은 편집 의도가 궁금합니다.

길예경 『그런가요 1호』는 처음부터 윤원화, 큐레이터 현시원님 초청을 염두에 뒀었고, 원래는 이분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려고 했어요. 첫 회의에 당시 비엔날레 팀의 출판 전담 어시스턴트 큐레이터였던 강유미님을 포함하여 네 명이 모였던 기억이 납니다. 공동 글쓰기에 관한 여러 방식, 한 공간에서 함께 쓰거나 한 문장이나 문단씩 각자 이어서 쓰는 실험적인 방식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결국에는 각자 쓰게 되면서 뚜렷한 주제 없는 자유로운 글들을 모았습니다. 『그런가요 1호』의 주제는 ‘걷기’와 ‘공동의 글쓰기’가 되겠네요. (현재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 『그런가요 1호』 참여 필자 두 분과 함께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좌) 『그런가요』 열람 공간.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서울시립미술관, 2016. 강유미 제공 (우) 『그런가요 1호』 「가이드 가이드」 지도 앞면, 2016. 글과 번역: 윤원화, 교정과 감수: 아비 알퍼트, 디자인: 신인아

길예경 걸으면서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나 쓰는 언어가 달라진다고 하지요. 도시 공간에서 우회 혹은 표류와 같은 심리지리학(psychogeography)의 방법론을 채택한 문화예술 프로젝트들이 있었습니다.3 걷기, 글쓰기에서 좀 더 넓혀서 지도 만들기를 시도했어요. 우리의 작업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주위를 걷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산책의 참여자 중에는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도 꽤 있었어요. 「가이드 가이드」를 인솔하신 윤원화님이 영상 촬영을 원치 않았고, 저 역시 일시적 글 생산 모임을 기록하는 것이 인위적인 행위라 생각해요. 출발 전과 이동 중에 찍은 사진이 몇 장 남아 있습니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1996–2022 보고서』에 수록된 구 서울 600년기념관 내부 사진도 이때 참여 필자가 촬영한 것입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외에 여러 분관이 생겼고, 서울시 자체도 너무 크기 때문에, 전체를 걸어서 다닐 수가 없어요. 우리가 시도한 것은 그 당시여서 가능했고 의미가 있습니다. 일종의 글쓰기 준비 모임에서 조를 짜서 ‘걷기’를 중심에 둔 이 프로젝트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만약 제가 ‘편집장’으로서 주제를 정하고 진행되는 내용들을 통제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제약이 있을 때 더 재밌는 글쓰기가 나오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방식은 문학인이든, 편집자든, 큐레이터든,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전문가의 영역이라 생각했어요. 제가 방향성을 제시하고 이끌기보다는 참여자가 모이면 함께 자유롭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의 미술 환경을 상기해보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여러 ‘신생 공간’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하면서, 미술관과 같은 제도가 특정 주체를 호명하고 호명되는 것에 관한 반발심이나 의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진정한 ‘참여’에 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협업이나 협력은 일시적인 퍼포먼스 같아요. 「가이드 가이드」에서 걸으면서 더욱 열린 사고와 대화를 나누게 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사무실에 앉아서 어색한 대화를 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신생 공간’처럼 새로운 움직임을 담아내는 억지스럽지 않은 참여에 ‘걷기’가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프로젝트에는 우리가 걸었던 그 거리만큼만, 그 시간만큼만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뚜렷한 주제가 없음에 관해 말을 하지 않아도 책 자체를 통한 전달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은가요? 비엔날레 전시장 내에 『그런가요』 열람 공간이 마련되었는데, 그런 거죠. 출판물만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보다 이 출판물의 배경을 설명해야 프로젝트가 온전히 전달됩니다.

SMB 『그런가요』는 개별 간행물이 형식부터 내용, 디자인까지 매우 다른 4개의 이슈로 발간되었습니다. 각 호마다 책임편집을 맡은 이들의 배경부터, 활동, 성향, 관심사도, 편집 활동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빼면 언뜻 서로 겹쳐지는 지점이 거의 없어 보이는데요. 또한 『그런가요』라는 이름과 비엔날레 크레딧, 각 호 뒷면의 다음 호에 대한 짤막한 안내 외에는 공통분모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독립적 형태의 출판물이 만들어진 배경이 궁금합니다.

길예경 저(는 저널 『볼』을 통해)와 게이코 세이, 그리고 치무렝가(응토네 에자베)는 도큐멘타 12 매거진스 프로젝트(2007)에 참여한 적 있어요. 게이코 세이는 『도큐멘타 12 매거진』에서 편집자로, 도큐멘타 12 매거진스 프로젝트에서 지역 코디네이터로 일했습니다. 이 인터뷰를 계기로 찾아보고 알게 되었는데, 『그런가요』 4호 「급진적 기대」 의 책임편집을 맡은 미겔 로페즈는 그 매거진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러 저널을 자신의 블로그에 소개했군요.4 백지숙 예술감독님은 처음에 『그런가요』를 ‘지라시’ 형식으로 제작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사실 신문 형태는 그동안 여러 비엔날레나 기관에서 시도된 적 있고, 형식만으로 발언하는 것도 있습니다. 『치무렝가 크로닉 / 그런가요』 3호 「시체 전시와 지난 그래픽 스토리」의 책임편집을 맡은 치무렝가는 그동안 신문 형식으로 출판물을 제작해왔고, 정확한 기억은 아닙니다만 아마도 전시팀의 사전 연구 단계에서 퍼포마(Performa) 15에서 소개된 치무렝가를 만나고 신문 형식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는 각 호마다 출판물의 판형과 내지 디자인이 서로 다른 자유로운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예술감독님이 구상했던 형식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저는 출판물에 있어서 디자인은 내용의 위계나 중요도에 따른 색과 데이터의 선택, 사용자에 관한 고려, 디자인 도구는 무엇을 쓰는지 등 세부적인 선택 하나하나가 모두 디자이너의 정치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출판물에서 거의 절반은 디자이너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책 디자인에는 디자이너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출판물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 디자이너의 의중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가요』에서는 출판물 디자이너로 장문정님이 초대되었습니다. 3호의 경우 치무렝가는 초청때부터 기존의 출판물인 범아프리카 계간지 『크로닉』의 연장에서 특별호를 기획했기에, 정해진 판형을 바꿀 수 없고 내부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해야 한다는 조건에 놓여져 있었어요. 3호는 신문 형태로 디자인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1~3호도 같은 형태로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술감독님이 던져주신 화두가 있었지만, 진행 과정에서 변화하고 생겨난 생각들, 특히 초청한 필자로부터도 어떤 글이 나올지 예상할 수가 없었지요. 이처럼 기획안이 나오고 글을 읽고 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SMB 지면에 미처 싣지 못한 「가이드 가이드」 대본 공개를 위한 독자, 관객을 초청하는 연계 행사를 기획하였다고 하는데, 어떤 자리였는지 듣고 싶습니다.

길예경 『그런가요 1호』 말미에 “「가이드 가이드」 대본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썼고, 전시장에 별도의 열람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전시는 강유미님이 진행했습니다. 「가이드 가이드」 대본이 마치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두루마리 원고처럼 낱장이 이어져 멋지게 설치됐고, 지도 형태의 「가이드 가이드」는 인쇄해 배포했습니다. 「열린출판회의 3」에서 만난 큐레이터 리즈 박이 이 지도를 인상 깊게 봤고 관객 스스로 상연하면(enact) 좋겠다고 말했어요.

SMB 지금까지 출판된 비엔날레 도록들을 살펴보면, 정확한 정보 확인도 쉽지 않을 만큼 목적이 다른 구성을 가진 출판물이 초기에 제작되었고, 출판에 관한 전문적인 접근이 있었던 2010년 6회 비엔날레를 지나, 2014년 8회 비엔날레는 주제를 심화해서 살펴보는 선집 형태의 독립 출판물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2016년 9회 비엔날레는 출판이 비엔날레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으로 비엔날레 구조 안에 들어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렇기 때문에 편집위원은 물론이고 팀 내에 출판을 전담하는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년에 개최된 12회 비엔날레는 이런 지난 비엔날레의 경험을 참고하여 사전프로그램 연도부터 매월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소식지』를 발행하였고, 도록의 역할을 가이드북(안내책자)와 선집으로 분배하여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근래 들어 전시에 관한 정보와 기록 사진 중심의 도록이 관례적이고 의미 없다는 시선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분명 필요하기도 하고요. 미술에서의 출판에 편집이라는 행위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 선생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초기 전시 도록은 전시 비평의 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현재는 비평을 수행하는 주체부터 전달하는 매체까지 다변화하였으며, 전시를 감상하고 소비하는 형태도 과거와는 매우 달라졌습니다. 전시 형식 자체도 달라지는 상황에서, 전시에서 출판이 반드시 필요한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길예경 개념미술에서 특히 많지만, 전시 없이 출판물로만 존재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러니 반대로 출판물 없는 전시도 있을 수 있겠죠. 미술 출판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전자출판과 민주적인 디지털 문화를 자주 언급하고 진보적 미디어 활동가들은 물리적인 아카이브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온라인이 중요한 플랫폼이긴 하지만 디지털로 읽고 쓰는 것을 줄이자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종이 출판물에 관한 새로운 집중과 흐름도 있죠. 결국 독자가 중요한데요, 누가 독자이고 관객이냐에 따라 출판물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시와 작품의 구성이 출판 형태로 풀기 어려운 경우에는 출판물 없는 전시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혹은 전시 동선이 통제되고 결과물이 정해져 있는 체험형 전시도 출판물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기본적으로는 전시의 출판물은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작품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해주는 매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타이포그래피와 편집 디자인과 인쇄 등의 책 제작에 관한 한, 당대 한국에 어떤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알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겠지요.

SMB 9회 비엔날레 도록에도 편집자로 기여하셨습니다. 도록은 비엔날레 전체의 종합적인 결과물이기도 하여 더 많은 사람들과 협업이 필요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필자가 14명이고 편집 기여자는 선생님을 포함하여 5명입니다. ‘편집’이라는 크레딧 내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분담하여 진행하였는지, 그리고 최종 결과물이 처음부터 의도되었던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전시 기획에서 편집자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필요하다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비엔날레 기록만 살펴봐도, 초기에는 총감독, 전시감독, 예술감독이 책임 편집과 필자 초청 등 모든 일을 도맡아 하였지만, 외부 출판사, 편집자와 협업을 하기도 했고, 편집자의 역할도 점점 세분화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의 경향만 봐도 출판과 편집은 점점 전문가의 영역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 같습니다. 비엔날레에 출판 전담 인력, 혹은 전문적인 에디터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길예경 우선 ‘편집’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참여하는 출판물마다 스스로 역할을 정의해왔습니다. 그리고 정확한 편집 관련 용어를 만들자고 제안도 하였고요. ‘편집’이라는 역할만 더 자세히 보자면 프로젝트 에디터(project editor), 매니징 에디터(managing editor), 커미셔닝 에디터(commissioning editor)처럼 분할된 업무에 따른 세분화된 명칭이 존재합니다. 큐레이터 폴 오닐(Paul O’Neil)과 저술가 루시 스티즈(Lucy Steeds)와 함께 일하는 미술 출판 편집자이자 연구자인 게리 판 노르트(Gerrie van Noord)가 정리한 명칭과 편집 내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시길 추천합니다. 2016년 비엔날레에서 저는 『그런가요 1호』와 도록 필자를 섭외하는 등 부분적으로나마 기획/원고 의뢰 편집자5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출판 이전에 미술에서 전문가는 누구일까 생각해봅니다. 미술사를 전공하거나, 큐레이터학과를 나온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죠. 저는 전문가가 아닌데, 그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마지막 세대라 생각합니다. 제가 일을 시작할 당시에는 촘촘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를 ‘전문’이 아니라 ‘전담’하는 사람(dedicated person)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미술 잡지에서 기자로 일했고, 기자에서 자유 번역가와 편집자가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기자의 역할이 취재한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있지만, 필자 섭외부터 지면 구성까지 확장된 역할을 하면서 여러 경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기자가 디자인도 직접 해보는 실험을 하면서, 디자인 도구를 사용해 일종의 ‘편집 디자인’에 관한 개념을 익혔습니다.

미술 제도에서 관장님 혹은 예술감독님마다 모두 출판물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비중이 다를 뿐이죠. 비엔날레에서 편집자란 편집장(예술감독)과 디자이너 사이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2016년 비엔날레 출판물에서 많은 부분 디자이너의 결정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술감독님이 어떤 화두를 던진 이후에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초기 제안과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 간극이 큽니다. 이것은 비엔날레와 같은 규모를 가진 행사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수많은 발상이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취득되고 예술감독님이 상상한(envisioning) 최종 결과물에 다가가게 됩니다. 2016년도의 비엔날레는 출판 전담 인력을 구성한 것이 좋았다고 봅니다. 함께 일할 사람을 위한 적절한 자리를 만드는 것이 당시 예술감독님이 미술 기관과 비엔날레 성격의 큰 전시에서 하시던 방식이었어요. 그 자리에 꼭 전문가를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전담자라는 표현은 저의 자의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제안받은) 자리에 제가 맞는다고 여길 때, 그 프로젝트에 합류합니다. 비엔날레에서 제가 수행했던 것들이 최근 연구 논문으로, 이론적으로 다뤄지고 있더라고요.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면 무엇이 생기는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이론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 언어화하는 사람이 전문가라 생각합니다. 미술 출판에 대해 이런 전문가들이 이론화하여주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비엔날레의 출판물에 대해 더 정확하게 총평하는 공식적인 자리가 필요할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전문화되면서 이것이 패턴화되거나 고정화되는 건 경계해야 합니다. 전문화되면서 고정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비엔날레 팀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종합하자면, 편집자의 역할은 지성사를 다루는, 아니, 게이코 세이의 말을 빌리자면 “분석하고 생각하기 위한 언어를 찾는” 일을 하는 문화 활동가(cultural activist)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제 경우는 그런 사람들을 옆에서, 뒤에서 지원하는 일이 많고요. 지성이 어떻게 어디로 움직이는가를 관찰하고, 미술과 접점이 되는 철학, 사회학, 문학 등의 타 영역을 소개하고 그 흐름에 관해 대화하는 사람이요. 그게 잡지가 되고 출판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시간, 노력, 인력이 충족되어야 성공적인 프로젝트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술감독의 특성과 결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전담/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편집자적인 사고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어요. “미술이 모든 것을 흡수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듯이, 현재 동시대 미술은 타분야와의 협업을 통해 많은 것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야별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편집자라 생각하고, 저는 이런 것에 흥미를 느낍니다. 미술이 철학, 미학, 사회학, 인류학, 고고학 등 다른 학문에서 자양분을 가져오고 이를 작업화하는 과정에서, 미술가는 다른 분야에 대해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하죠. 특히 현재는 기획 단계부터 타 분야와 협업을 하며 공통의 질문을 제기 때문에, 여러 분야에 걸친 경험과 지식을 이해하고 가져오고 재배열하려는 편집자적인 방식과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MB 출판 형태의 변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지난 비엔날레에서는 도록, 선집, 안내책자, 무가지, 소식지, 웹 출판 등 여러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비엔날레와 출판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고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길예경 어떤 비엔날레든 각자만의 고유한 성격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도시와 미술, 그리고 미디어 자체에 대한 고민과 변화상을 다룰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전시를 통해 보여질지 프로그램이나 출판물을 통해 전달될지는 매번 다른 방식이겠지만, 비엔날레의 관객을 누구로 보는가에 대한 질문이 항상 동반되고 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드니 비엔날레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출판물을 꾸준히 선보이는 것, 테이트 미술관에서 교사를 위한 설명서를 제작하는 것처럼 일시적 몸짓에 그치지 않고 지속성 있는 출판물이 생산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비엔날레와 출판물의 관계를 보면 이런 예시들이 떠오릅니다. 따로 찾지 않고 모든 것이 같이 열려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에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미술 전시의 역사적 증거를 뒷받침하는 2차 자료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나요”를 함께 외치면서도 이메일과 외장 하드에서 귀중한 자료를 찾아내 사실 확인에 큰 도움을 준 강유미님께 특별한 고마움을 이 지면에 적습니다.

인터뷰 일자: 2024년 2월 16일


  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에서 발행한 시각 예술 비평 계간지 저널 『볼』은 아르코아카이브와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레퍼런스 라이브러리) 등의 여러 미술 기관에서 읽을 수 있다. 저널 『볼』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10호가 나왔으며, 2020년 설립 20주년을 맞은 인사미술공간은 11호 특별호를 냈다. 

  2. 『그런가요』는 「열린출판회의」의 출판 편집위원들이 제안한 주제를 바탕으로 4개호로 발간된 비정기 출판물이다. 웹사이트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3. 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이재형 옮김(서울: 책세상), 2014. 프랑스어 원문은 2009년에 나왔으며, 참여 필자들에게 보낸 2006년 3월 1일자 이메일에서 이 책을 소개했다. 

  4. 미겔 로페즈의 블로그, 2024년 5월 1일 접속. 

  5. 김학원, 『편집자란 무엇인가』 개정판 [전자버전], 휴머니스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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